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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해야 했다”...독립PD 이승구가 담은 세월호 3년

“함께 행복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 위한 좋은 통로” [인터뷰] 표재민 기자l승인2017.04.13 11: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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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걱정도 있을 법 하지만 이 PD는 대수롭지 않게 ‘누군가는 해야 했다’라고 했다.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자고 3년이었다. 정식 촬영을 진행한 것만 300일이 넘었다. ⓒ 이승구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해상에서 침몰한지 3년이 됐다. 정부가 정부답지 않은 일들을 벌이거나 우왕좌왕하는 사이, 우리는 거대한 세월호가 빠르게 침몰하는 참혹한 광경을 지켜봤다. 3년 만에 육상으로 올라온 세월호, 미수습자들은 여전히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진상 규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게 나라냐’는 한탄이 가득했던 허술한 사회 안전망은 여전하다. 그렇게 세월호는 대한민국의 아픔이자 분노다. 세월호 사고를 둘러싼 파헤쳐야 할 진실들, 끝까지 몰두해야 할 진상 규명은 더 좋은 사회를 위한 디딤돌이 될 터다.

 

그 믿음으로 지난 3년을 달려왔고, 앞으로도 세월호, 그리고 피해 가족들과 함께 할 PD가 있다. 세월호가 전남 목포 신항만에 거치된 후 독립 PD인 이승구는 잠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또 내려간다. 이승구 PD는 기성 언론이 팽목항을 떠난 후에도 피해 가족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서울과 진도 팽목항을 오고가며 미수습자 가족들 곁에서 ‘기록 PD’로서 카메라를 들었다. 당장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걱정도 있을 법 하지만 이 PD는 대수롭지 않게 ‘누군가는 해야 했다’라고 했다.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자고 3년이었다. 정식 촬영을 진행한 것만 300일이 넘었다.

 

3년의 시간 동안 세월호 문제를 기록했다고 들었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조카가 여전히 세월호에서 구조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언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내가 진실을 전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 도와달라는 말에 내려왔다. 전국민이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봤다. 전국민의 트라우마가 있는데, 그리고 당시에는 모든 언론이 세월호 사고에 집중하고 있는데 나 혼자 이 세월호를 기록할 수 있을까 고민이 있었다. 나는 거대 방송사와 달리 장비와 경제, 인력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까 고민이 있었다. 처음에는 두 달 정도만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내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색은 더뎌지고 수색이 이대로 종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겼다. 가족들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촬영을 했다. 어머님들이 나를 ‘기록하는 PD’라고 해경에게 말하더라. 나는 모든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를 믿고 받아주신 거다. 해경이 내가 촬영하는 것을 막으면 어머님들이 ‘기록 PD’라고 같이 들어가겠다고 해주셨고, 나 역시 힘을 내서 왜 촬영을 못 하게 막냐고 싸웠다. 그렇게 모든 것들을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시신을 찾고 한 분, 두 분 체육관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 역시 두려웠다. 수많은 가족들 중에 10여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 마지막에 남는 가족이 누구일지 무서웠다.

 

함께 한 시간만큼 가족들이 의지를 많이 했을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 가족들이 다른 이들이 시신을 수습해 떠날 때마다 불안해 했다. (허)다윤이 엄마(박은미 씨)가 내게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냐고 물어봤다. 아이들 찾을 때까지 있어달라고 하시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있겠다고 했다. 3개월이 흘렀고, 7개월이 지났다. 11월 11일은 수색이 종료된 날이다. 난 그날부터 빼빼로데이의 의미가 사라졌다. 내겐 수색 종료일이다. 수색 종료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정부는 어쩔 수 없다고 말을 하는데 느낌상으로 뭔가 불순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허)다윤이 엄마(박은미 씨)가 내게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냐고 물어봤다. 아이들 찾을 때까지 있어달라고 하시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있겠다고 했다. ⓒ 이승구

세월호 침몰 이후 복잡하게 얽혀가는 상황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나는 가족들의 문제에 개입하면 안 됐다. 중간자로서, 관찰자로서 지켜봐야 했다. 내가 개입을 하면 순수한 기록물이 아니라 내가 짜는 판이 될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선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가족들과 3년을 함께 보내다보니 친해졌고 그 선을 지키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가족들이 내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해?’라고 물어보시는 일이 많았다. 정말 난감했다. 내가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느낌상 이런 것 같다’ 정도로만 마음을 전했다. 결정하고 판단은 가족들의 몫이었다. 한 평범한 가족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얼마나 큰 상처를 입는지, 정부는 이 가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 사회는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지켜보는 게 중요했다. 가족들이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싸우고 희생하는 모습을 담아야 했다. 참사라는 수렁에 빠져 있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누구 하나 해결해주지 않았다. 가족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내가 그랬다. 내가 세월호 아이들이 우리 사회가 잊지 않도록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가족들의 이 싸움을, 이 고통을, 이 눈물을 기록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가족들의 동의 속에 기록할 수 있었다.

 

계속 기록만 했으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2015년 1학기까지는 대학 강의를 했다. 진도 체육관에서 일요일 저녁까지 있다가 월요일에 서울에서 강의를 했다. 강의만 하고 진도를 내려가는 일을 반복했다. 촬영하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강의도 하면서 생업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세월호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학교에서는 다들 어떻게든 강의를 하려고 하는데 왜 스스로 안 하겠다고 하냐고 하시더라. 농담으로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고 난 후에도 자리가 있으면 다시 받아달라고 말하고 그만뒀다.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내 마음이 세월호에 가 있는데 학교에서 내가 앉아서 떠들고만 가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계속 마음은 세월호 현장을 떠올리고 있는데 강의실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게 됐다.

 

분명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순간이 닥쳤을 텐데 후회하지 않았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웃음) 누군가는 남아서 해야 했다. 세월호 기록이 아닌 다른 일들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등산을 하다 보면 산 전체는 보이는데 길 전체는 보이지 않지 않나. 길에 대한 의심은 있지만 산 전체가 보이기 때문에 계속 간다. 우리가 2~3년은 예상하는데 앞으로의 10년, 20년은 예상 못하지 않나. 그런다고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기록을 하다보니깐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이 느껴진다. 그런데 갑자기 오솔길이 보이더라. 지치고 힘들어서 주저앉으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 다시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다행히 우리 가족들이 많이 도와주고 이해를 해준다.

 

그리고 주변에서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많이 도와준다. 내가 그 친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렇게 도와준다. 가장 어렵고 가장 내 삶이 바닥으로 내려갈 때 남는 사람들이 있더라.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내가 만약에 돈을 열심히 벌면 돈은 쌓이겠지만, 이렇게 세월호 기록을 하면 내가 좋은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도와주시는 지인들도 세월호 아픔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이런 참사도 발생하지 않고, 소외되는 사람이 없기를 힘 없는 사람들이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거다.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건강한 마음이 나를 통로로 삼아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기록 역시 그렇게 좋은 통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록물이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 세월호 침몰 사고를 통해서 정부와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건강한 마음이 나를 통로로 삼아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승구

언젠가는 촬영이 마무리되는 날이 올 텐데, 작품 공개는 어떻게 할 건가.

 

촬영을 시작하고 2년 9개월 만인 지난 해 11월쯤 주로 촬영을 한 다윤이, (조)은화 어머니(이금희 씨)에게 다큐멘터리 출연 동의를 구했다. 그동안 기록만 하고 어떻게 만들겠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어머님들에게 다윤이와 은화를 찾기 위해 노력하신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다. 어머님들도 정부가 그동안 말을 바꿔왔기 때문에 기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정부가 말을 바꿀 때마다 내게 촬영 원본을 보여달라고 하셨고 그렇게 몇 번 보여드렸다. 3주 정도 고민할 시간을 드렸고 12월쯤에 출연하시겠다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달라고 하시더라. 다윤이나 은화가 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신 것 같다.

 

내가 기록했지만 가족들의 허락이 있어야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정말 슬프게도 미수습자 가족들은 다른 가족이 아이의 시신을 찾으면 축하해준다. 아이를 수습한 가족은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먼저 올라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아이를 찾았다며 떡과 고기를 해온다. 아이의 시신을 찾아준 잠수사에게 고맙다고 말을 한다. 아이가 죽어서라도 돌아오는 게 축하 인사를 할 수 있는 거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언제나 시신만이라도 찾고 싶어 한다. 그런 분들을 기록했고, 그런 분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가 될지 나도 궁금하다.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기록하고 있다.

 

3년간 기록하면서 많이 답답하고 안타까웠을 것 같다.

 

세월호뿐만 아니라 대구 지하철 참사 등 10년간 재난 현장을 담았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1년을 기록했다. 국가는, 정부는, 우리 사회는 참사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피해자와 가족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독일 비행기가 알프스 산맥에 추락한 사건이 있었다. 독일어를 잘 하는 박사님께 기사 번역을 부탁해서 관련 기사를 계속 읽었다. 독일 총리를 비롯해 얽혀있는 각국의 정상들과 공무원들이 현장에 직접 왔다. 산꼭대기라 길이 없었는데 길을 내더라. 숙박시설이 없었던 몇 안 되는 산골 마을이었는데 마을 주민들이 피해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게스트하우스로 열었다. 학교 교사들이 언론이 피해 가족들을 취재하지 못하게 막았다. 우리처럼 가족들에게 심정이 어떠냐고 묻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지역 소방대원들이 투입되고 당시 많은 학생들이 죽었는데 그 학교는 경찰들이 외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했다. 그리고 심리 전담 교사들이 학생들을 돌보는 일이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속전속결로 대응하고 지역 주민들이 피해 가족들을 살피는 체계가 있는 거다. 우리처럼 누구의 책임인지 전가하고, 누가 허가를 해야하는지 살피다가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없는 거다. 시간 싸움을 놓쳐서 아까운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거다.

 

이번에 스텔라 데이지호 사고 역시 마찬가지다. 매뉴얼이 없고, 참사는 반복된다. 실종자 중에 어떻게 보면 나와 선후배 관계인 사람이 있었다. 원래 알고 있었던 사이는 아니지만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예상대로 어떻게 대책을 꾸려야할지 가족들이 경황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빨리 대책위원회를 만들라고 말씀드리고 힘내고 버텨야 한다고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세월호를 겪으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알고 있고, 이런 도움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족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만으로도 큰 힘을 얻는다고 하더라. 이번에 인양이 되기 전까지 한동안 언론이 세월호 문제에 관심이 없지 않았나. 육상에 거치된 후 대다수의 언론이 떠났다. 다시 관심이 줄었다. 그때 팽목항이 조용했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됐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다시 남아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고 고민을 하는 거다. 세월호가 올라올 때 잠시 기도를 했다. 아이들이 온전히 기다려주기를, 엄마들을 다시 만나기를, 모두 찾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길 기도했다.

 

참사 현장, 어렵고 힘든 기록만 하는 이유가 있나.

 

모르겠다. 눈을 떠보면 난 항상 거기에 있다. 사람들이 피하는 곳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가야 한다. 누군가는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 나이 되도록 집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탄을 하고, 누군가는 아이들 교육 문제를 걱정한다. 세월호도 결국 돈 문제였다. 돈만 있으면 법도 피해가는 세상이다. 그런데 정직하지 않게 돈을 모은 사람들의 말로는 어떤가. 돈은 꼭 필요한데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3년간 돈을 모으지 못했지만 중요한 시간과 기록을 모았다. 물론 이 기록물은 내 것이 아닌 피해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내보낼 수 있는 기록물이다. 언제나 ‘기록 PD 어딨냐’고 나를 찾아주시는 어머님들의 기록물이다. 정말 소중한 기록물이다.

▲ 나는 기록할 수 있고 그래서 앞으로도 쭉 기록하고 연출을 할 거다. 세월호 기록이 마무리되면 다른 기록을 시작하지 않을까. 물론 늘 이제 더 이상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말을 하더라도 난 또 카메라를 들고 있을 거다. ⓒ 이승구

앞으로도 이 세상을 기록하는 일들을 계속 할 건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 다큐멘터리를 컬러 TV로 봤다. 그동안 흑백 기록만 있었는데, 당시 내레이션이 잊히지 않는다. 미국인 선교사가 당시 최고의 카메라로 기록을 했다는 부분이었다. 나도 저런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이 씨앗이 돼서 지금도 기록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안 할 수 없다. 나는 기록할 수 있고 그래서 앞으로도 쭉 기록하고 연출을 할 거다. 세월호 기록이 마무리되면 다른 기록을 시작하지 않을까. 물론 늘 이제 더 이상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말을 하더라도 난 또 카메라를 들고 있을 거다. 이 세상에 정말 고마운 분들이 많다. 내가 3년 동안 세월호를 기록하면서 ‘저 사람 어떻게 살아?’라고 생각하고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연락을 해서 커피를 사마실 수 있는 쿠폰을 주기도 하고, 당 떨어질 때마다 마시라며 초코 우유 24팩을 보내주시기도 한다. 가끔 특강 자리를 마련해주시는 분들도 있어서 그 분들 덕에 살 수 있었다. 그런 고마운 마음을 되새겨서 미수습자 가족들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 이 세상에 내놓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표재민 기자  jmpyo@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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