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강용주를 위한 카바티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미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겨우내 촛불을 밝힌 시민들은 평화와 정의와 신뢰가 넘치는 세상을 꿈꾼다.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나라, 불공정 경쟁 때문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는 사회, 그리고 언론과 검찰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신뢰의 세상…. 선거운동이 시작됐고 장밋빛 공약이 홍수를 이루는 지금, 어처구니없는 일이 하나 생겼다. 4월 28일, 강용주씨가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일을 방치한다면 아무리 좋은 대통령을 뽑는다 한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까?

 

먼저 음악을 듣자. 베토벤의 <카바티나>, ‘작은 노래’란 뜻이다. 폭풍 같은 삶을 뒤로 하고 만년에 도달한 평화가 배어있다. 화사한 햇살 아래 삶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노래한다.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3번 Bb장조 Op.130 중 5악장 <카바티나> (연주 이탈리아노 현악사중주단) 바로 보기

 

 

1980년 5월 광주, 강용주씨는 고3의 시민군으로 도청 앞에 서 있었다. 그는 5월 27일 새벽, 도청이 계엄군에게 함락되고 시민군들이 체포되어 손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총을 버리고 현장에서 도망쳐 나왔다. 방황 끝에 뒤늦게 의대에 진학한 것은 5월 광주에서 피흘리며 쓰러진 시민들을 치료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모습에 감동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의한 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피끓는 젊은이의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의 모진 고문 끝에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의 일원으로 조작됐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때 나는 MBC의 신입 PD였다. 안기부 연출, MBC 제작의 간첩 특집에서 내 또래 젊은이들이 줄줄이 간첩으로 엮이고 있다는 심증을 가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것이 평생 부끄러웠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양심수들을 석방하면서 ‘준법서약’을 요구했다.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으로서 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맹세하면 풀어준다는 것으로, 군부독재 시절 악명을 떨친 ‘전향공작’처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었다. 국가가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해 놓고 오히려 반성문을 요구하는 격이었다. 이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남들보다 1년 더 옥살이를 하고 1999년 풀려났다. 젊은 시절을 오롯이 바친 14년만의 출옥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때였다. ‘시대의 죄인’인 방송 PD로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들이 석방되기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어머니를 인터뷰하고 잠시 곁에 있어 드린 것뿐인데, 그는 과분할 정도로 내게 고마워했다. 김환균, 조능희 등 동료 PD들도 <PD수첩>을 통해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그의 외로운 투쟁을 세상에 알렸다. 대단한 투사일 줄 알았던 그는 담백하고 유쾌한 청년이었다. 출소하자마자 우리 PD들을 쥐락펴락 웃기고 울렸다. 그는 거창한 이념보다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처럼 소박한 자유와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젊은이였다.

 

그가 감옥에서 겪은 일도 전해 들었다. 그 어린 스물셋의 나이부터 그는 ‘전향공작’에 시달렸다. 수없이 끌려가서 맞았고, 수갑 채워진 채로 징벌방에 갇히기 일쑤였다. 어떤 교도관은 빨갱이라며 침을 뱉기도 했다. 그런 모욕 속에서도 그가 견딘 이유는 단순했다. 저열한 폭력에 굴복할 수 없는 순수한 내면, 자신의 존엄 때문이었다.

 

강용주씨는 38살 늦은 나이에 의대에 복학, 어린 후배들 틈에서 공부를 마쳤고 드디어 가정의학전문의가 됐다. 어머니 조순선 여사는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리 밤중이라도 병원 문 두드리는 사람 있으면 열어주어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너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가라. 아무리 돈 없는 사람이라도 아프다면 꼭 치료해 주어라.” 그는 (재)진실의힘에서 억울한 조작간첩 피해자들의 재활과 치유를 도왔고,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창립하여 5·18 부상자와 유족들의 상처를 치유했고,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데도 열심이었다. 2015년, 광주 MBC는 그를 ‘희망인물’로 뽑았고, 현직 PD들의 연수기관인 (사)한국PD교육원은 그에게 패컬티(전담교수) 직을 맡겼다. 자기의 상처를 움켜안은 채 이 시대 상처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그의 활동은 이렇게 철저히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이뤄졌다.

 

이런 그가 보안관찰법의 ‘신고의무’를 어겼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됐다니 기가 막힌다. 이 법에 따르면 국가보안법과 형법상 내란, 군사반란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 중 법무부가 ‘재범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사람은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어디로 여행을 갔는지, 3개월마다 자신의 행적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강용주는 이 제도 역시 전향제도나 준법서약처럼 내면의 양심을 침해한다고 생각했기 떄문에 신고를 거부했다. 보안관찰법에 따르면 이 ‘신고의무’를 어기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현재 보안관찰 대상자는 약 2,300명 가량이고, 이 중 ‘신고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사람은 43명이라고 한다.

 

이미 14년이나 옥고를 치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것은 명백한 이중처벌일 뿐 아니라, 민주사회가 당연히 보장해야 할 기본권을 짓밟는 야만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내 자유를 침해하는 당국에게 나 스스로 협조하라는 식이니, 여기에 순응하는 건 민주시민의 양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검찰은 2017년, 광화문의 촛불이 행진을 거듭하고 있을 때, 이 낡은 잣대로 그를 슬그머니 기소했다.

 

국가는 이제 강용주씨를 자유롭게 내버려둘 때가 된 게 아닐까. 강용주씨는 젊은날 자기 몸을 바쳐 이 땅의 민주화에 밑거름이 됐다. 석방된 지 18년, 그는 억울한 희생에 대한 보상을 추구하는 대신, 자기 상처에서 돋아난 새 살로 이 시대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살아왔다. 재판부는 보안관찰법의 위헌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의뢰해야 하며, 정부와 검찰은 그 동안의 고통에 대해 강용주씨에게 사과해야 한다.

 

베토벤의 <카바티나>가 흐르고 있다. 그는 청각상실로 좌절했을 때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 이렇게 썼다.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이여!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베토벤은 ‘상처입은 치유자’였기에 위대했다. 5월 장미대선을 앞두고 정의, 평화, 신뢰가 넘치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희망이 피어나고 있다. 좀 더 나은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상처입은 치유자’ 강용주씨의 값진 희생과 노력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함께 감사해야 할 때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