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 날 26] 봄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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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나의 봄은…….

깊은 잠을 자던 생명이 봄 맞을 채비를 하느라 땅 아래서 두런두런거릴 때, 내 심장도 겨울옷을 헤집고 봄나들이 가자고 안달을 해댄다. 머리보다 발이 먼저 알아듣고 행차하는 곳,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번영로 길가에 위치한 집이다.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전주-군산 구 도로를 자동차 규정 속도를 지키며 15분 남짓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살짝 휘어진 길 오른편 끝자락에 ‘그 집’이 있다. 수십 년은 되었을 법한 목련나무가 탐스러운 집, 어느 해인가, 출근길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담벼락 위로 몽실몽실 맺힌 목련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무심히 고개를 돌린 순간, 눈앞에 서늘하게 아름다운 목련이 들어왔고, 흰 목련은 그대로 마음속에 인화되었다.

그로부터 봄날이 되면, 날이 따뜻해지면, 어쩐지 목련이 필 것 같아서, 그 목련을 보려고, 오른쪽 창가 좌석을 가슴 졸이며 고대하곤 했다. 버스에 올라 오른쪽 창가 좌석이 비어있지 않으면 내려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 여러 번. 봄날, 그 짧은 순간에 그 집 목련과 조우하려고 말이다. 난리였다. 내겐. 눈을 마주치자마자 휘익~ 눈앞에서 사라진 목련은 하루 종일 심장 옆에 달라붙어서 그리움으로 남았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 따스한 기억들

언제까지 내 사랑이어라 내 사랑 이어라

거리엔 다정한 연인들 혼자서 걷는 외로운 나

아름다운 사랑얘기를 잊을 수 있을까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양희은 노래 / <하얀 목련> 가사)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면서, 직행 버스에서 휘리릭 스쳐 지나간 목련의 아쉬움을 달래듯, 그의 존재를 더욱 깊게 확인하기 위해 나름의 정성을 쏟기로 했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서 그 집 앞에 조금 더 머물러 있기로 한 것이다. 커피라도 한잔 손에 쥐어지면 그야말로 호사다. 긴장감 없이 무장 해제된 철제 대문 사이로 고개를 들이 밀고 염치없이 기웃거리다 보니 뒤란에도 대여섯 그루의 목련나무가 제법 키 큰 울을 형성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는 몰랐는데 찬찬히 들여다보니 목련이 많은 집이다. 목련이 이쁘기도 하다. 대개의 가정집에 목련 한두 그루 심어진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그 집 목련은 단연 숫자도 많고, 풍성함이 돋보인다. 안주인이 각별히 목련을 좋아하셨을까?

그렇게 3월부터 시작된 ‘그 집’ 순례는 해마다 봄철의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출근길에 그 집을 지나치면, 퇴근길이라도 들러서 길 건너에 차를 세우고 건너편에서 목련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자동차의 폭주를 뚫고 길을 건너 집 앞을 서성이곤 했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이은상 작사/ 현제명 작곡 <그 집앞>)

 

어느 해인가, 그 집에 변화가 생겼다. 주인이 바뀐 건지, 아니면 내부 수리를 하는지 각종 중장비며 건설 자재가 마당에 쌓여 있었다.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건설 장비를 보면서, 그 와중에 행여 목련나무를 싹둑 베어 버리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마치 불법건축물 감시라도 하듯 출퇴근길에 슬쩍 눈길을 주기를 여러 번, 다행히 목련은 이변 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그를 보며 안심했다.

나 말고도 그 집 목련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했던 후배 Y는, 출장 가는 길에 ‘그 집’ 목련을 발견했다며 나중에 집을 지으면 그렇게 목련으로 담벼락을 두르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에 요가 명상 지도를 위해 출연하던 J 언니는 서툰 운전과 길치의 이중고 속에 내가 일러준 그 집 목련을 보기 위해 꼬박 일 년을 기다리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방송국 출연을 위해 그 집 앞을 지나가다 꽃이 피면 “목련이 활짝 피었어야~.” 라며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 환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그 집’ 목련은 우리에게 봄철 주요 행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일 년에 딱 한 차례, 그 며칠의 개화를 기다리면서 헤맨 것이다.

 

별빛으로 다가오는 네 작은 모습에

잠 못 이뤄 찾아왔네 그 집 앞

불빛 꺼진 네 창가엔 슬픔만 더해와

혼자 몰래 울고 가네 그 집 앞

꽃잎으로 새겨버린 그리운 이름을

부르다가 찾아왔네 그 집 앞

대답 없는 네 창가엔 아픔만 밀려와

눈물지며 돌아서네 그 집 앞

이제 다시 다시는 너를 생각 말아야지

돌아 올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인걸

이제 다시 다시는 울지도 말아야지

어차피 잊어야 할 슬픈 기억인걸

그 집 앞 우우 난 아직 떠날 수 없어

그 집 앞 우우 난 너를 지울 수 없어

그 집 앞 우우 난 아직 떠날 수 없어

눈물 속에 서성이네 그 집 앞

(이재성 노래 / <그 집 앞> 가사 일부>

 

재작년 봄, 폐암으로 투병하던 Y는 목련이 피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해 나 역시 유방암 수술과 항암으로 그 집 목련을 보지 못했다. 이태 간격으로 J 언니도 목련꽃이 필 무렵 자궁암으로 영면에 들었다. J 언니는 남편 C 목사와 함께 Y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던 영적인 관계였기에 그들과 자매처럼 지낸 나 역시 충격과 아픔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올봄 목련꽃은 유난히 크고 몽글었다. 그 집 대문은, 투박한 철제 대문 대신 좀 더 세련된 격자무늬의 대문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마당으로 시선을 이끌던 열린 대문은 닫히고, 창살무늬 같은 대문을 통해 몸을 낮추고 들여다보는 형국이어서 마치 남의 집을 훔쳐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럴지라도, 오가며 눈 호사하는 즐거움과 남다른 기쁨을 원초적으로 제거하지 않은 집주인의 공덕을 칭송하며 봄마다 그 집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김제시 백구면 난산 삼거리 지나 신호등으로부터 열을 세면 나타나는 그 집, 올해 목련이 얼마나 곱고 이뻤는지, 봄비에 후드득 지고 말지라도 그 짧은 봄을 찬양하기 위해 기나긴 겨울을 인고해온 꽃들의 노력과 꽃 한 송이 피어내려는 절실한 몸짓이 얼마나 가상한지, 얼기설기 얽힌 전선 아래 다투어 담벼락에 고개를 내민 해맑은 아이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한 송이 한 송이에 마음을 담아 보냈다. 그렇게 4월은 가고 있었다.

 

사월은 가고 꽃은 피는데

그 님 오지 않고

그리운 날 또 다시 찾아온

오월의 편지

철새따라 멀리 갔던

그 님의 편지는

그리운 날 또 다시 찾아와

나의 마음 달래 주네

 

봄 여름은 가고 꽃잎 떨어지면

철새 떠나가고

봄이 오면 또 다시 찾아 올

오월의 편지

철새따라 멀리 갔던

그 님의 편지는

그리운 날 또 다시 찾아와

나의 마음 달래 주네

(소리새 노래 / 5월의 편지 가사 일부)

 

지난주 출근길에 살펴보니 봄비에 여지없이 목련은 잎을 떨구었다. 떨어진 꽃잎에 애달파하며 그 집 앞을 지나쳤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살짝 눈가가 젖어오는데, 좌측으로 45도 꺾어 새 길로 접어들자 깜짝 놀랄 일이 펼쳐졌다. 길 양쪽으로 벚꽃길이 환하게 열린 것이다. 봄비에 꽃잎이 떨어지는가 하면, 봄비에 꽃을 피우는 것도 있었다. 안개비 속에 여린 분홍이 배시시 웃으며 피어나고 있었다. Y랑 J 언니가, 목련 꽃 스러진다고 아쉬워하지 말라고, 목련 지고 나면 또 다른 꽃이 반긴다고, 설령 그 꽃 지더라도 푸른 잎이 돋아난다고,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 앞에 펼쳐진 벚꽃 길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꽃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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