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라디오 방송교류 포럼] 일본은 어떻게 라디오 방송 한계를 넘어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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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김강훈 PD 기고문]

지난 5월 31일부터 6월 3일까지 3박 4일간 일본 오사카, 고베, 나고야를 무대로 한국PD교육원(이사장 오기현) 주최 <2017 한일 라디오 방송교류 포럼>이 열렸다. 지금까지의 한중일 PD 포럼이 수도권 TV 위주로 진행됐다면 이번 포럼은 ‘지역 방송’과 ‘라디오 방송’에 초점을 맞춘 투 트랙으로 실시되었다.

내가 속한 라디오 참가자들은 오사카를 기반으로 하는 민영 라디오 방송국 두 곳을 찾아 그들의 성공전략과 지역 청취자들과 다양하게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연수 마지막 날에는 1995년 대지진을 극복하고 일어선 고베 지역을 방문해, 일본 방송사들의 재난 방송 노하우를 배우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 한일 지역방송교류 포럼에 참가한 라디오PD들과 한국PD교육원 관계자 ⓒ 김강훈

 

‘라디오와 함께 고도(故都)를 걷는다’


연수 2일차에는 ‘지역 라디오 방송 활성화 및 지역 특화 콘텐츠 개발’이라는 주제로 오사카에 위치한 MBS 방송국과 FM802를 견학했다. 지역 라디오방송이라고 하지만 오사카는 고베, 교토, 나라 등의 인근 도시를 포함해 2천만 명의 타깃 오디언스를 가진 큰 시장이고, 두 방송국 모두 지역성(locality)을 잘 살린 편성과 프로모션으로 지역 대표 방송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MBS(마이니치 방송)의 상징적인 프로그램으로 <Radio Walk(라디오 산책)>라는 연례 이벤트가 인상적이었다, <Radio Walk>는 오사카와 인근의 고도(故都) 나라, 교토 등지의 유적지를 라디오 진행자와 청취자가 함께 걸으며 진행하는 참여형 생방송 포맷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시도한 적이 있는 ‘라디엔티어링’과 유사한 구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6시간 정도 진행하는 생방송에서 청취자들은 평소에 만나보고 싶었던 방송 진행자들과 유적지를 함께 걸으며 역사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길거리 공연을 즐기기도 한다. <Radio Walk>의 시작은 36년 전 영업 비수기인 2월과 8월을 어떻게 넘길까 고민하다 ‘사람을 모으자’는 아이디어로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바로 여기 해당되는 것 같다. 최초 행사에서 300명 정도 모일 거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3만명이 모이는 대성공을 거뒀고, JR 철도회사와 지자체 등이 스폰서로 참여해 큰 수익을 안겨주는 효자 프로그램이 되었다.

단 한 번의 이벤트를 위해 1년 전부터 20여명의 제작진이 투입되는 준비 과정에서는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이 돋보였다. 제작진은 10Km 정도의 본 행사 코스를 확정하기 위해 사전에 30~40Km를 걸으면서 전파가 잘 터지나 일일이 체크하고, 학교나 건물 옥상, 산 위에 수신점을 둬서 방송 사고를 미리 예방한다고 한다. <Radio Walk> 특집을 할 때마다 엔지니어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닌데 휴대용 배낭 형태로 만들어진 무거운 전파송신 장비를 매고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PD들이야 방송 내용만을 생각하고 코스를 정하지만 엔지니어들은 송수신 가능여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더 복잡하다고 한다. 어떤 해는 기술적으로 무난한 코스를 택해 엔지니어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루해 하더라는 견학 안내자의 말이 재미있었다. 20년 경력의 이마마치 아키라 PD는 ‘아하! 엔지니어는 도전에 부딪힐 때 오히려 희열을 느끼는구나!’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힘들고 고생돼야 보는 사람이 즐겁다는 방송의 진리를 베테랑의 경험으로부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프로그램의 리더인 PD는 당장은 욕을 먹더라도 힘들고 어려운 목표를 스태프에게 던져줌으로써 그들의 능력을 끊임없이 끌어올리는 동기유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요즘 우리나라도 역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배우는 여행, 공부하는 여행에 대한 트렌드가 싹트고 있다. tvN <알쓸신잡>이 그런 예다. 경주(삼국시대), 인천/목포/군산/부산(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서울(조선시대) 등 이야깃거리가 차고 넘치는 곳이 너무 많다. <Radio Walk>는 촌스럽다고 거들떠보지 않았던 주변의 일상에서 ‘지역성’과 ‘역사성’을 끌어내 멋진 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주었다.

▲ 지난 3월 2일 열린 MBS 코스 개략도(9.5Km). ⓒ MBS


 

엔카와 아이돌 음악, 오리콘차트를 거부하는 ‘곤조있는’ 방송국 FM802


MBS에 이어 찾아간 곳은 ‘Meet the Music On the Radio’라는 캐치프라이즈로 청취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음악전문 라디오 FM802였다. 엔카와 아이돌 음악을 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음악전문 라디오 FM802는 1989년에 개국했다. 당시 간사이(關西) 지역 인기 스테이션이었던 FM Osaka, MBS 등과 경쟁하기 위해 후발주자 FM802는 차별화를 택했다. 기존 라디오가 중고생이나 노년층을 주력으로 삼은데 반해, FM802는 ‘Funky Music Station FM802’을 표방하며 16세~34세를 겨냥한 젊은 선곡을 전략으로 삼았다. FM802는 스스로를 매스 미디어가 아닌 Class Media(대상을 특정 계층으로 좁힌 매체)라고 불렀다. 중간에 일시적으로 경쟁사에 쫓기는 일도 있었지만 다른 방송국과 똑같은 뻔한 선곡을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고집은 성공으로 이어졌고,  FM802는 오사카에서 가장 사랑받는 라디오가 되었다.

최근 들어 젊은층이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는 ‘라디오의 위기’는 FM802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FM802는 음악 페스티벌 등 이벤트를 통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콘서트에서 방송국의 타임테이블을 나눠주거나 자사의 DJ가 음악 페스티벌의 사회를 보는 식으로 홍보하기도 하고, 아예 FM802가 주최하는 대형 페스티벌을 기획해 청취자와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FM802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Rock Kids 802]/ [FM802 Rockin’Radio] 같은 대형 콘서트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정말 부러웠던 건 이런 이벤트가 홍보성 공개방송 수준을 넘어 대형 록 페스티벌의 스케일로 기획된다는 것이다. 흥행에 위험이 따르긴 하지만 티켓 판매와 스폰서 유치를 통해 자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 FM802 개국 28주년을 축하하며 가수들이 보낸 화환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마침 방문한 날이(6.1) 개국기념일이었다. ⓒ 김강훈

 

“TV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는가가 중요하지만, 라디오는 얼마나 가깝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방문했던 오사카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지역 방송이라는 한계에 굴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고도(故都)라는 지역적 자산을 적극 활용하거나(MBS의 <Radio Walk>), 음악이라는 라디오 본연의 기능에 충실했기 때문에(FM802)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MBS와 FM802의 각기 다른 성공전략 이면에는 공통점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청취자와 더욱 가깝게 교감하기 위해 항상 고민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스튜디오에 머무르지 않고 외부 이벤트를 적극적으로 기획한다는 것이었다. 종합편성(MBS)과 음악방송(FM802)으로 장르는 다르지만 양사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던 얘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청취자와의 소통’이었다. “TV는 얼마나 많은 지역을 커버하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는가가 중요하지만, 라디오는 얼마나 가깝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가가 중요하다”는 이마마치PD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21년차 PD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에게 첫사랑 라디오에 대한 순정을 깨우는 한마디였다. 또한 청취자와의 소통이 먼저 이뤄지면 청취율과 수익성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진리를 배운 Back to Basic의 경험이기도 했다.

 

“정보가 생명을 구한다”, ‘정상화의 편견’을 깨부수는 것이 재난 방송의 역할


연수 3일차에는 고베 인간과 방재 미래 센터를 견학하고, NHK 재난방송 전문가 노부루 야마자기 씨로부터 재난방송 관련 강의를 들었다. 한신 대지진(1995년), 대구 지하철 참사(2003년),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년), 동일본 대지진(2011년) 등 굵직한 재난재해 현장을 경험했던 베테랑 기자는 ‘정상화의 편견’이라는 화두로 재난방송의 지향점을 설파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나 세월호 사건에서 경험했듯이 사람은 큰 사태를 만났을 때 제대로 피하지 못한다. 기차 안에 연기가 꽉 차고 배에 물이 차오르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시를 기다리라”는 방송을 듣고 가만히 있더라. 이렇듯 “재해가 나와는 상관없겠지”, “큰일은 없을 거야”라는 정상화의 편견이 피해를 키운다’는 경험을 얘기하면서, 재난현장 방송과 대비 방송을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려서 희생자를 줄이는 것이 재난방송의 역할이라고 소리 높였다. ‘정보가 생명을 구한다’는 간단명료한 한 줄로 재난방송을 대하는 방송인의 자세를 설명했다.

 

乐之者 不如 質問之者


돌아보면 3박4일의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일본 라디오 방송국의 생존전략을 엿보는 수확과 더불어 포럼에 참가한 다른 PD들의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후배에게서는 뜨거운 열정을, 선배에게는 경험과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건 우리를 인솔했던 대선배들의 모습이었다. 퇴직을 1년 앞둔 MBC 라디오PD 조정선 선배는 ‘지금 라디오의 위기는 음악방송의 위기’라며, 창의적 발상으로 저작권 문제 등을 해결해 청취자가 제대로 된 음악방송을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PD수첩>을 진행했던 송일준 선배는 Q&A 세션마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나이에 상관없이 늘 배우는 자세가 성공의 비결임을 보여주었다. 공자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乐之者)’고 했는데, 여기에다 ‘즐기는 사람도 질문하는 사람은 당할 수 없다(乐之者 不如 質問之者)’고 덧붙이고 싶다.

안타까운 점도 있었다. MBS와 FM802 같은 지역 라디오가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일본의 성공적인 지역균등발전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수도 도쿄 외에도 각 지역별로 거점 도시가 잘 발달해 있고 교육, 경제 등에서 지방만의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 그런 산업적 밑바탕이 있었기에 지역 라디오 또한 지속가능한 매출과 청취율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온 국민이 서울만 바라보고, 모든 것이 수도 한곳에만 집중된 우리 현실에서는 지역 방송, 지역 라디오의 생존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새 정부가 지방분권에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하니 가까운 미래에 대한민국에도 지역성을 살린 근성있는 라디오가 나타나리라 희망해본다.

[자료 출처]
▲ MBS <Radio Walk> 홈페이지 http://www.mbs1179.com/rwalk/
▲ FM802 홈페이지   https://funky802.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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