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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30년, 언론운동 30년②]노태우 정부, 민주와 반민주의 격돌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l승인2017.06.20 10: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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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언론운동의 씨앗

엄혹한 독재정권 시절인 1984년 12월 1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창립됐다. 이 모임은 5공화국의 어둠 속에서 최초로 민주언론의 기치를 내걸었을 뿐 아니라, 6월항쟁 이후 펼쳐진 다양한 언론운동의 맹아가 됐다. 민언협은 기관지 <말>을 창간하여 정론의 빛을 밝혔다. 86년 9월 6일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김태홍, 신홍범 등 <말>지 편집진에게 자료를 제공, ‘보도지침’을 폭로한 것은 5공화국 언론 통제에 커다란 파열구를 만들었다. 민언협은 88년 한겨레신문 창간까지 민주화를 위한 동력으로 큰 역할을 했고, 1998년 3월 (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으로 개편되어 언론개혁을 위한 시민참여를 이끌어냈고, ‘이달의 좋은 보도, 이달의 나쁜 보도’를 선정, 언론을 감시·비판했고, 최근 대선 국면까지 – 현직 언론인들이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 선거보도감시운동을 줄기차게 이어갔다. 박정희 · 전두환 정권의 해직 기자들이 주도하여 민언협을 결성했다는 사실은, 6월항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언론운동의 전통이 70년대 동아투위, 80년대 해직언론인들의 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 준다.

 

‘땡전뉴스’에 항의하여 85년 일어난 KBS시청료거부운동은 방송의 주인인 국민들이 직접 참여한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KBS시청료거부 범국민운동본부는 “KBS TV를 보지 않습니다”란 스티커와 유인물을 100만장 이상 뿌렸고, 86년에는 야당인 신민당을 끌어들여 범국민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지금까지 이만큼 대중적인 관제방송 거부운동은 일어난 적이 없다. 민언협의 활동과 KBS시청료거부운동은 6월항쟁의 밑거름이 됐다.

 

미디어 빅뱅과 언론노조 탄생

87년 6월, 시민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기어이 목표를 달성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여 시민민주주의를 꽃피웠고, 군부쿠데타가 불가능한 시대를 열었다. 언론은 권위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경쟁시대에 진입했다. 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다양한 종류의 신문과 잡지들이 창간됐다. 87년 9월부터 신문 증면이 이루어졌고, 10월에는 기독교방송이 뉴스를 재개했고, 11월에는 언론기본법이 폐지됐다. 88년 5월 15일 자본금 50억원, 발행부수 50만부의 국민주신문인 <한겨레>가 출범한 데 이어 <국민일보>(88/12/10), <세계일보>(89/2/10) 등 종합일간지가 창간되었고, 경제지를 비롯한 특수지, 지방지도 늘어났다. 87년 32종이던 일간지는 92년 6월 말 92개로 5년만에 3배 가까이 늘었다. 주간, 월간, 격월간, 계간 등 모두 6,380개(유가지 3,271개) 매체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미디어의 빅뱅이라 할 만한 변화였다.

 

87년 10월 한국일보 노조를 필두로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에 노조가 들어서서 편집권 독립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MBC노조는 방송사 최초의 파업으로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황선필을 축출하고 방송문화진흥회를 탄생시켜 공영방송의 기틀을 마련했다. 부산일보 노조도 파업을 통해 추천제를 쟁취하여 편집 편성권 독립의 토대를 확보했다. 그해 11월에는 언론노동자들의 단결의 구심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결성됐다.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군부 잔재를 청산하는 언론의 노력이 이어졌다. KBS <광주는 말한다>, MBC <어머니의 노래> 등 5공청산 특집들을 비롯,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금기시됐던 영역들을 과감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부와 자본의 반격

언론운동의 기본 스탠스는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시민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워 나가는 방향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의 대응은 다층적이고 종합적이었다. 기자, PD들의 노조 활동은 시민운동과 결합하여 폭넓은 실천으로 이어져야 했지만, 곧 노태우정부의 반격에 부딪쳤다. 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유화적 태도를 취하던 노태우 정부는 89년 들어서자 문익환 임수경의 방북을 계기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리력을 동원한 KBS 재장악에 이어 방송구조개편과 상업방송 출범으로 자본의 공세가 본격화됐다.

 

① KBS 재장악

1990년은 정부와 방송노조가 정면으로 충돌한 파국의 해였다. 노태우 정부는 일단 KBS를 직접 장악하고자 했다. 정부는 ‘법정수당 사건’을 빌미로 KBS의 첫 민선 사장인 서영훈을 퇴임시키고 5공 시절의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서기원을 새 사장에 임명했다. KBS 사원들은 서기원의 출근을 저지했고, 정부는 4월 12일 경찰 병력을 투입하여 117명의 사원들을 연행했다. KBS 사원들은 제작거부 투쟁에 돌입했고 정부는 4월 30일 다시 경찰을 투입, 사원 333명을 연행했다. MBC, CBS 사원들이 동조 제작거부를 벌였지만 한국 언론사 초유의 대규모 물리적 충돌은 21명의 구속자와 11명의 해직자를 낳고 5월 17일 일단락됐다.

 

② 방송구조개편과 SBS 출범

KBS에 대한 물리적 탄압은 ‘방송구조개편’을 추진하기 위한 정부의 사전정지작업이었다. 정부가 6월 14일 발표한 ‘방송구조개편 계획’은 ‘민방 허용, KBS 기구축소, 공보처장관의 KBS 감독, 교육방송의 문교부 귀속, CBS와 PBC의 종교방송 50%이상 편성, 방송위원회의 심의·제재 권한 강화, 방송사장의 편성·인사권 보장’ 등의 조항을 담고 있었다. “MBC의 위상에 관해서는 추후에 별도 검토한다”고 했다. KBS, MBC, CBS, PBS 등 방송4사 노조의 연대제작거부에도 불구하고 방송관계법(방송법, 한국방송공사법, 방송광고공사법)은 7월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날치기 통과했다.

 

1990년 10월 31일, 정부는 건설업체 (주)태영을 새 민방*의 지배주주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다음해 12월 SBS-TV의 개국으로 지상파 TV의 시청률 경쟁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방송 인력의 대규모 이동이 이어졌다. 외주제작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외주 비율이 해마다 높아졌다. 기존 공영방송사는 자회사로 분할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비정규 인력이 방송사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방송 시장 개방으로 외국 자본의 국내 방송 유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권 기간에 신문, 방송의 무한 경쟁 체제가 이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 정부는 ‘민영방송’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당시 노조는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개인 기업이 소유하는 방송이라면 ‘사영 상업방송’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결론지었다.

 

자본의 공세를 정권이 돕는 행태는 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향신문을 LG에게 넘기려는 경영진의 움직임에 노조는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며 파업으로 맞섰다. LG는 기자들의 저항에 놀라서 신문에서 손을 뗐지만, 최병렬 공보처장관은 89년 12월 이성수 노조위원장, 강기석, 박인규, 고영신, 조성환 등 5명의 기자를 해고한 뒤 한화에 지분을 넘기도록 만들었다. 80년 해직사태 이후 언론사 최초의 해고가 자행된 곳은 경향신문이었다.

 

③ 언론사 내의 노동통제

기자 · PD들의 실천을 저해하는 요소가 무수히 많았던 게 사실이다. 아이템 선정, 구성, 내용, 멘트 하나까지 간부들의 통제가 따르고(1990년대 중반까지도 언론사의 임원 및 중간간부들 중에는 자기검열이 체질화된 사람이 많았다), PD·기자에 대한 프로그램 배정(의식 있는 PD에게 요리 프로그램을 맡기고 보수적인 PD에게 시사 프로그램을 맡기는 경우) 및 인사 발령(열성 노조원인 기자를 스포츠 취재부로 발령하는 경우 등)으로 저항을 원천봉쇄한다. 어떤 기자나 PD는 아예 연수를 보내거나 한직으로 돌리고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린다. 과중한 업무량과 노동 시간, 그 자체도 노동 통제의 한 형태다. 90년대 초에 활용되기 시작한 치밀한 노동통제 방식은 2010년 이후 이명박 정권의 주구인 김재철, 안광한, 김장겸 체제의 MBC에서 극단적인, 탈법적인 형태로 자행됐다.

 

신문사는 CTS와 풀 페지네이션(full pagination)의 확산으로 납활자와 식자공이 없어지고, 제판 업무가 간단해졌다. 신문 생산과정이 단순화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료실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조직의 규모를 줄여서 신문사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인력과 고정비용을 줄이고자 했다. 미디어 생산조직의 규모를 줄였고 저널리즘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게 되었다. 조직의 유연성이 증대하면서 다양한 매체들이 수시로 시장에 진입 · 퇴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신문사들은 생존이 우선, 정론은 그 다음이 돼 가고 있었다.

 

김주언은 역저 <한국의 언론통제>(2008)에서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 통제, 미디어(Media) 통제, 메시지(Message) 통제의 측면에서 언론통제 방식의 변화를 살펴보며, 물리력에 바탕한 정부의 직접 통제에서 언론자본과 시장에 의한 구조적 통제로 일관되게 변화해 왔음을 밝혔다.

 

“이제는 자본과의 싸움”

1991년 9월 6일, 김중배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이제는 자본과의 싸움”이라고 선언한 뒤 손석춘 기자와 함께 동아일보를 떠났다. 이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된 뒤 윤정모, 안병욱, 제정구 등을 지면에 소개하면서 사주와 충돌을 빚었고, “체제 부정과 위화감 조성” 운운하는 사주의 비난과 편집진 교체 움직임에 맞서 사표를 내고 스스로 야인(野人)이 되었다.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동아일보의 위상과 브랜드도 사라졌고, 신문의 품질도, 엄정한 비판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사주가 편집권을 보장해 주면 소신껏 일할 수 있었지만, 사주가 정한 틀을 뛰어넘을 때면 대립이 발생했다. 손석춘은 “10년 전까지 (적어도 사석에서는) 멀쩡한 생각을 가졌던 선배나 동료들이 이상한(?) 칼럼을 쓰는 것을 보고 있자니 서글퍼지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김 국장은 “사주의 선의를 믿는 운동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손석춘, 미디어오늘 인터뷰, 17/5/17). 김중배 선언은 시대정신의 정곡을 찔렀지만, 구체적으로 자본과의 싸움을 어떻게 벌여야 할지, 체계적인 비전과 조직적 실천방안이 무엇인지 언론운동가 및 기자 · PD 사이에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방송노조의 한계

90년대, 방송인들의 한계는 곧 드러났고, ‘방송민주화운동’에 뭔가 심각한 허점이 있다는 게 명백해졌다. 필자의 소논문 <방송민주화운동이란 무엇인가>(1989)는 방송민주화운동을 ‘정치투쟁을 매개로 한 문화운동’으로 정의했고, 궁극적으로 ‘프로그램을 통한 대국민 연대’가 생명이라고 보았다. 방송 내용을 통해 ‘시민 사회’의 영역을 넓히고 확고히 굳혀야 하며, 그래야만 6월항쟁 ‘무임승차’의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의 정서에 비하면 너무 이상적인 주장이었다. 파업에 참여했던 기자 · PD가 방송 현장으로 돌아가면 사용자 편이 되어 노동자를 매도하는 일이 자꾸 벌어졌다.

“노조원인 기자가 출연해서 생산직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을 매도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는 명백한 자기모순이다. 프로그램을 통한 대국민 연대의 끈을 잃어버리면 자사이기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민주화에 기여하고 국민에게 보답한다는 노조의 창립정신이 흐려진다면 국민의 지지를 스스로 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기자 · PD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민주방송’의 비전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했지만 자기 한계 속에 안주했기 때문에 정부의 탄압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MBC노조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90년 9월 4일 방송할 예정이었던 <PD수첩> ‘우루과이 라운드,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편이 최창봉 사장의 지시로 갑자기 불방됐고, 이에 항의하던 안성일 위원장과 김평호 사무국장이 잇따라 해고됐다. 이 사건에서 극적으로 표면화된 MBC의 노사 갈등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 및 드라마 <땅> 폐지 사건과 맞물려 노조 집행부의 333일 철야농성을 유발했다. 학생들의 분신 항거가 이어졌지만, 김지하의 조선일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박홍 서강대 총장의 “분신배후” 발언, 이어서 강기훈 유서대필사건과 정원식 총리 밀가루사건으로 저항은 잦아들었다. 언론은 이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언론과 노동운동이 침체상태에 접어든 1992년 가을, MBC노조는 50일 파업으로 최사장을 몰아내고 해직자를 복직시켜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했다. 언론노조 · 기자협회 · PD연합회는 MBC노조에게 민주언론상을 주었지만, 한겨레 · 경향을 제외한 대다수 언론(MBC뉴스 포함)은 MBC노조의 투쟁을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방송 노조는 정부의 물리적 공격을 그럭저럭 견뎌냈으나 ‘방송구조개편’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장기간의 갈등은 노조원 사이에서도 ‘투쟁에 대한 피로감’을 낳았다. 시청자들은 방송노조가 결국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익집단 아니냐’는 의구심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시 한 언론학자의 지적이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방송 노조의 설립을 기점으로 방송 민주화의 몸짓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의 TV 방송은 질타와 고발의 대상일 뿐이다. ‘비판’ 뒤의 ‘충고’가 아니라 ‘고발’ 뒤의 ‘대결’이 있을 뿐이다. 엉겅퀴와 가시덤불만 자랄 수 있는 토양을 갈아엎지 않고서 장미꽃과 사과나무를 기대 하는 환상에 빠져서는 곤란 할 것이다.” (김해식 <한국 텔레비전 방송의 구조와 성격> 실천문학, 1990 가을)

 

6월항쟁 이후 ‘죽 쒀서 개 준’ 것은 노태우 집권뿐이 아니었다. 학생과 시민들의 피땀어린 희생으로 시민민주주의의 틀을 확보했지만, 그 내용을 채운 것은 자본의 탐욕과 질주였다. 시청자 운동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고, 방송 윤리 강령과 취재 준칙을 제정하고 촌지 사건을 단죄하는 등 자정운동도 일어났다. 6월항쟁 5년, 언론운동 진영은 정권 · 자본과 팽팽한 대립 · 균형을 이룬 채 노태우정권 마지막 해를 맞고 있었다.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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