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규찬 in 타르투⑬]최남수 YTN 사장 내정자를 반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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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한예종 방송영상과 교수)] 쓰레기통을 뒤지고 빈병과 휴지를 주우며 경제 생활하는 사람들도 사는 에스토니아라는 북국에서 글을 씁니다. 이곳 타르투나 핀란드 헬싱키보다 한국 서울의 날씨가 요즘은 더 춥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바깥 한 데서 벌벌 떨고 있을, 추운 데서 고생할 사람들이 걱정입니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 성재호 언론노조 KBS본부장의 광화문 단식농성은 다행히 끝났지만, KBS의 파업 대오는 지침 없이 100일을 훌쩍 지나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선을 언론계로만 가두면 절대로 안 됩니다. 훨씬 더 많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카메라 바깥에서 혹한에 내몰리고 있으니까요. 가까이 공덕 옛 철로변 공터에는 컨테이너에 겨우 몸을 피해 이모들의 보살핌에 기대어 1년째 버티고 있는 내 제자, 청년주거난민 희성이 있습니다.

국회 앞에는 형제복지원 국가폭력 피해자, 내 파트너 종선이 30일 넘게 찬 바닥 위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고요. 이런 ‘세상 시시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 생활경제 문제가 안 풀려 고통 받는 을들의 물정에도 혹 평소 관심이 많으신지요.

직접 대면하고 전하는 게 옳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서한으로 대신합니다. YTN노조가 협성 결렬을 선포하며 최남수 사장 내정자의 지명 철회와 현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런 시점에, 내부 구성원 일부와도 통해 보이는 인간이 나서 또 이런 글을 써대니, 무시해 버리고 싶을 심경일 겁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지난 11월 10일 한국전력 서울지역본부 앞에서 '시대정신 역행하는 YTN 부적격 사장 내정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PD저널

그래도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최 선생이 꿈꾸는 세상은, 당신이 기존에 천명해 온 입장에 비춰볼 때, 최소한 나 같은 종자가 희망하는 세계와는 180도 다르다는 점을 말이죠. 최소한 나는 당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과는 사회 이해, 사회 변화의 뜻을 절대로 같이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촛불혁명 직후 YTN의 사장이 되는 데 결코 동의할 수가 없고 지지를 표할 수 없다는 점을. 

당신은 항의하고 나선, 반대의사를 표방한 YTN 내부 구성원들을 향해, “후배들과 세상을 보는 관점 다르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였지요? 당신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소연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후배들이 내 손 잡아 줬으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풀”면, 그리고 나를 “잘, 그리고 제대로 봐 줬으면.”

그렇지만 여기에 덧붙여 당신은 이렇게 제법 큰 포부까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성원과 함께 촛불민심 방송으로 실현”하고 싶다. 이런 거창한 말을 들으니 외부자인데도 솔깃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궁금해집니다. 대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는 사람이기에 치욕 청산의 YTN 중창을 선언한 사람들과는 물론이고 촛불 민심과도 뜻을 함께 한다는 것일까?

궁금해 최근까지도 썼던 칼럼을 찾아봤습니다. ‘기업의 시대, 권력의 시대’라는 제목의 <머니투데이> 칼럼을 한번 볼까요? 머니투데이 방송 대표로서 쓴 것입니다. ‘기업’과 ‘권력’을 구별 짓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기업을 바라보는 중국 정부의 따뜻한 시선“을 강조한 후, 미국 실리콘 밸리의 성공 사례를 강조하면서, 최 선생은 ’대한민국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합니다. 대조적으로, 우려 섞인 목소리로 그려냅니다.

우린 경제와 산업을 살리자고 총론적 얘기를 하면 한목소리를 낸다. 똑같은 얘기인데 “기업을 밀어주자”고 말을 바꾸면 “기업 편”이라는 불편한 딱지를 붙이지 않나. 이중적이다. 경제와 산업의 불쏘시개를 점화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이 뛰어나갈 주로(走路)에서 장애물을 치워줘야 한다. 문제만 생기면 한쪽 방향으로 쏠림이 일어나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까지 몰아치듯 규제의 날을 세우는 것은 과잉 그 자체다. 문제만 정확히 해결하는 데서 힘을 절제하는 대신 기업의 도움닫기를 돕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머니투데이> 2017년 2월 22일자 '최남수 칼럼')

언뜻 보면, 균형감각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기업’에 대한 ‘권력’의 규제완화 필요성이 핵심입니다. 특수한 ‘기업’의 문제를 일반의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의 문제로 등치시키는 낡은 지배 이데올로기, 편파적인 신화가 글을 관통합니다. 거대화된 재벌의 지배적 이익을 ‘기업’이라는 애매한 말로 가리면서요. 최순실이라는 민주정치 농단의 고리를 통한,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의 불순한 협착·부정한 내통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난 바로 그 시점에, 최 선생의 관심은 이렇듯 전혀 딴 데 있습니다.

마치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 같습니다. 방송으로 촛불 민심을 반영하겠다면, 역사적 촛불대중의 의중은 얼추 따라잡고 있어야 할 법. 최 선생도 촛불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글로 표명된 당신의 뜻은 내가 공감하고 또한 바로 나이기도 한 촛불의 민심으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위 글이 2017년 2월 말 촛불 국면에 쓴 건데도 말이죠.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선고가 확정되기 전, 추위에도 불구하고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박근혜 탄핵을 외친 시민들이 진정 저런 생각을 함께 하고 있었을까요?

최 선생 같은 ‘기업’론자는 촛불의 뜻을, 촛불대중들의 경제정의 실현에 대한 희망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사실, 최 선생은 이전 글에서도 일관되게 기업 규제 완화를 고집했습니다. 그리고 친자본·친재벌·친기업주의 탈규제 정책으로 시민 사회와 시장 공공성이 철저히 파괴시킨 박근혜는 물론 그 이전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시민 주권자들의 준엄한 판정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당신은 놀랍도록 태연히 같은 지배논리를 반복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재벌의 부정에 환멸하고, 이게 국가인가 환멸을 표할 때조차, 소위 ‘권력의 시대’가 아닌 ‘기업’의 시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이란 게 그런 가르침입니까? 경제는 기업이고 산업인 게 맞나요? 그래서 당신도 ‘기업’을 위한 규제 완화에 충실한 국가가 곧 바른 경제를 펴는 국가라 역설하는 겁니까? 아니라 믿고 싶지만, 설혹 그렇더라도, 그건 촛불의 의사와는 최소한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역행할 따름이지요.

그러하니 당신의 믿음과도 어긋나는, ‘촛불 민심 반영’ 어쩌고 하는 언사는 거두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이념적 세계관은 촛불대중의 현실경제로부터 뚝 떨어져 있습니다. 낮은 자리 보통사람의 먹고사는 생활경제로부터 유리된 채, 당신은 규제완화와 탈규제로서 ‘기업의 시대’를 다시 열자는 낡은 경제관, 권력의 경제학을 고집합니다. 그런 기업경제론자가 촛불혁명 직후 재공공화가 절실한 YTN의 사장이 된다는 데 진정한 ‘촛불 민심’은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게 확실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뱉은 말이라 하진 않겠죠. 한국자본주의 보수 경제지의 생리를 어찌 그곳에 몸담은 당신이 몰랐겠습니까. 최 선생은 당신의 경제학을 고집하면 됩니다. 겨울 북국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이 휜 노인을 보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가난한 시절 살림살이 경제를 상기하며 눈물 훌쩍이는 이 우둔한 인간은, ‘기업의 시대’나 ‘권력의 시대’도 아닌 ‘민주 사회의 시대’를 간절히 소망하는 그런 사람이, YTN 사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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