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이 내게로 온날 35] 이토록 느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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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수필가] 첫눈은 예뻤다. 마치 조물주께서 “그래, 내가 맘먹고 한턱 크게 쏜다”라고 인심이라도 쓴 것처럼, 풍성하고 사랑스러웠다. 새초롬한 듯 그러나 조신한 자태로 하늘거리며 내려와 사뿐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맞이한 풍성한 첫눈을 서설(瑞雪)이라고 좋아했다.

새해 들어 눈 소식이 이어졌다. 화요일에 함박눈이 내렸다. 굵고 탐스러운 눈이 목화솜처럼 쌓였다. 함박눈이 내리면 그해 풍년이라고 덕담이 이어졌다. 첫 눈의 감흥을 되새기며 운전대를 잡고 출근했다. 예측한 것처럼 도로는 빙판길이고 속도는 거북이걸음이다. 제 시간 도착은 무리다. 안전하게 가는 것이 관건이라 운전에 집중했다.

중간에 사장님의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 길이 많이 미끄럽네요. 좀 늦어도 되니 천천히 천천히 출근하세요.’ 아침 일찍 보내주신 사장님의 문자를 보니 마음이 갑자기 편안해지며 안전감이 급상승했다. 평소 50분 걸리는 출근길이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됐지만, 마음의 평화로움 덕분에 초조하지 않다. 점심시간까지 투자해서 부지런히 편집과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이튿날도 눈이 왔다. 대설경보를 알리는 문자가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대설(大雪), 함박눈처럼 어감이 좋진 않았지만 심난함을 억누르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다행히 조금 빨리 출발한 덕에 큰 어려움 없이 회사에 도착했다.

문제는 이날 오후에 벌어졌다. 퇴근하려고 주차장에 나간 나는 10㎝ 정도의 눈이 자동차 지붕 위에 쌓인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사이, 그 두어 시간 동안 눈이 쏟아진 것이다. 폭설(暴雪)이다. 무슨 오지랖이라고 좌우 자동차의 운전석 눈을 털어주는 선행(?)까지 실천하며 빗자루로 자동차 눈을 대충 털어내는데 20여분이 소요됐다.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자동차들의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평소 5분이면 가는 배산 네거리까지 30분이 소요됐다. 아, 처음 그 느낌을 믿었더라면, 그대로 되돌아가 방송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직행버스나 기차를 타는 것이 좋았을 뻔했다. 안타깝게도 이 상황을 재차 확인하는 데 네 시간이 소요됐다. 험난한 귀로(歸路)의 서막에 불과했다.

 

▲ 지난 20일 오전 대설경보가 발효 중인 강원 속초시에서 속초소방서 구조대 대원들이 눈길에 미끄러진 자동차를 밀고 있다. ⓒ뉴시스, 속초소방서 제공

화려한 불빛으로 그 뒷모습만 보이며

안녕이란 말도 없이 사라진 그대

쉽게 흘려진 눈물 눈가에 가득히 고여

거리는 온통 투명한 유리알 속

그대 따뜻한 손이라도 잡아볼 수만 있었다면

아직은 그대의 온기 남아 있겠지만

비바람이 부는 길가에 홀로 애태우는 이 자리

두뺨엔 비바람만 차게 부는데

사랑한단 말은 못해도 안녕이란 말은 해야지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간 그대가 정말 미워요

(박선주 노래 <귀로> 가사 중)

 

방송사에서 집으로 가는 방법은 자동차 전용도로를 이용하거나, 삼례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원광대학교 네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자동차 전용도로로 접어들고 중간에 전주-군산 벚꽃 길로 빠져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자동차 전용도로 입구가 오르막이라서 이날처럼 폭설이 쏟아지면 그대로 빙판길이 된다. 여러 해 운전 경험 상, 가장 사고가 많이 나는 구간이기도 하다.

다음은 삼례를 거쳐 가는 방법인데, 이 경우 익산 시내를 통과해야 하므로 평소 자동차 전용도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10분 이상 소요된다. 눈이 많이 온 날은, 삼례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처음부터 방향을 그렇게 설정했다. 그런데 시내를 통과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저녁 무렵 갑자기 얼어붙은 빙판길에서 낮은 언덕도 오르지 못한 채 바퀴만 부르르 떨고 있는 자동차가 많았다.

시내 주행부터 인내를 요했다. 라디오 교통 정보에서는 내가 가고자 하는 삼례교에 큰 트럭이 미끄러진 채 방치되어 길이 막힌다는 소식이다. 난감했다. 어쨌든 가야만 했다. 눈은 그치지 않고 싸락눈이 되어 내린다.

운전한 지 두 시간 남짓, 나는 아직도 삼례 길목에 서있다. 자동차는 여름철 불나방처럼 모여들어 길을 세우고, 그 길은 불빛 되어 뒤로만 늘어서있지, 좀체 앞으로 움직이는 기세는 없다. 조금이라도 나아가야 할 텐데, 도통 움직이지 않는다. 마비 상태다.

그렇게 30여분 서 있을 무렵, 내 앞의 자동차 한 대가 과감히 중앙선을 넘어 좌측으로 빠지는 것을 보고 왼쪽에도 전주로 가는 길이 있을 거라고 직감했다. 길은 이어지니까, 좀 멀리 돌아가더라도 일단을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과감히 결단을 하고 앞 차를 따라가 본다. 돌더라도 가야겠다.

 

산 넘어 넘어 돌고 돌아 그 뫼에 오르려니

그 뫼는 어드메뇨 내 발만 돌고 도네

강 건너 건너 흘러 흘러 그 물에 적시려니

그 물은 어드메뇨 내 몸만 흘러 흘러

발만 돌아 발 밑에는 동그라미 수북하고

몸 흘러도 이내 몸은 그 안에서 흘렀네

동그라미 돌더라도 아니 가면 어이해

그 물 좋고 그 뫼 좋아 어이해도 가야겠네

산 넘어 넘어 넘어 돌고 돌아가는 길에

뱅글 뱅글 돌더라도 어이 아니 돌을소냐

흘러 흘러 세월 가듯 내 푸름도 한 때인 걸

돌더라도 가야겠네 내 꿈 찾아 가야겠네

(노사연 노래 / <돌고 돌아가는 길> 가사 일부)

 

내비게이션은 ‘삼례 나들목로’를 띄우고 깜빡인다. 사위는 온통 어둡고 가로등에 흩날리는 눈발이 더욱 선명하다. 이제 눈은 소낙눈이 되어 퍼붓는다. 45도 각도로 꺾여 내리는 눈발은 야속하다. 바람도 분다. 갑자기 외로워진다.

훗날 네이버 지도를 검색해보니 만경강을 가로질러 삼례와 전주로 잇는 다리는 익산에 가까운 쪽으로부터 삼례교, 하리교, 회포대교, 고산천교, 봉동교 등이 있는데, 삼례교 옆에 하리교가 있었다. 나는 생소한 하리교를 건넌다. 시속 6㎞였다가 조금 속도를 낸다는 게 20㎞ 정도, 군데군데 자동차를 세워두고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재난 영화에서나 보던 현상이 드러난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다행히 자동차 연료는 충분하다. 도로 안쪽으로는 아마도 그 유명한 삼례 딸기 밭일 것이다.

봄철 딸기 수확철에는 딸기 체험을 하는 가족들의 유쾌한 목소리가 도로를 메웠을 텐데, 지금은 온통 가스와 공회전, 지긋한 한숨이 섞여 막막하다. 문득 사철나무에 눈길이 멈췄다. 푸른 나무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은 그대로 눈 꽃송이다. 목화솜처럼 보드랍고 순수하다. 검은 겨울의 도화지에서 순백으로 빛나는 겨울 눈꽃은, 참 생소하다. 이렇게 느린 풍경으로 보니 더욱 사랑스럽다. 시속 6㎞, 나는 인내를 배운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달리고 싶다.

마침내 하리교를 건너 새로 닦인 길을 만난다. 나는 속도를 좀 올려본다. 30㎞, 40㎞가 이렇게 빠른지 다시 알아간다. 나는 비로소 달린다.

 

이제 더 이상 잃을 것도, 숨길 것도 없는 맨몸이지만,

거친 힘으로, 때론 악으로 세상 모두 짊어진대도,

난 일어설 수 있어~오!

가슴속에 밀려오는 눈물이,가끔은 나를 힘겹게 해도,

먼 훗날 다시 높게 우뚝설 나~의 모습

그려 보면서더 크게 웃어버려~오~

바람아 불어라 더 세게, 힘겨운 내마음 잊도록~

아픈 정열속에 나를 싣고,달려 내일을 향해.

멋진 내일을 위해,달려 저 끝까지~

(캔 노래 / <나는 달린다> 가사 중)

 

내비게이션은 심하게 구부러진 길목을 보여준다. S자의 연속인 이 길은 처음인 것 같다. 대체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미지의 세계에 던져진 나는 이승과 저승의 중간인 중천에 머문 것 같다.

이제 그만, 집으로 가고 싶다. 내 마음을 아는지, FM 클래식 프로그램에서는 유난히 ‘home'에 대한 선곡이 많다. Take Me Home,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리고 그 방송이 끝나갈 무렵, 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도 흘러나왔다. 너, 그 길에서 참 고달프구나. 이제 곧 집으로 가게 될 거야. 조금만 힘내렴! 그것은 마치, 절박함에 대한 신의 응답과도 같았다.

느린 풍경은 송천동 뒷동네 전미동으로 이어간다. 30여 년 전, 전주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을 때 나는 송천동의 작은 아파트에 살았다. 우리 아파트를 지나서 한참을 더 가면 비행장이 나오고 포도원 등을 지나면 나오는 동네가 전미동이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 합승이라도 해서 이 동네를 들어가게 되면 두려움에 떨며 20여분을 고문당해야 했던 그 험한 동네, 그곳이 개발되어 일부 큰 길이 나고 새로 다듬어진 것 같다. 마치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 전미동의 추억을 헤집고 나온다.

마지막 언덕에서 또 두 대의 차가 널브러져 있다. 다행히 나의 애마는 힘이 좋은지 언덕에서 곧잘 용을 쓴다. 조심조심 언덕을 넘고 보니, 비로소 낯익은 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송천동 아파트의 불빛이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여기서부터는 익숙한 도로다. 그 익숙함은 내게 마지막 용기를 준다. 오직 한 가지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이제 이 방랑을 멈추고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뿐.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9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마라톤 경기에서 사력을 다해 뛰고 난 기분이었다. 깔끔하게 방전되어 탈진 지경이었다. 주차장에서 가족들에게 무사 귀가를 보고한 후에야 비로소 안도감이 몰려온다. 운전 네 시간 만에 돌아온 집, 따뜻했다.

눈송이는 다시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풍경

우 우 풍경 우 우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풍경

(시인과 촌장 노래 / <풍경> 가사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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