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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연주가와 백인 매니저의 로드 무비...인종 갈등 넘어선 전복적 시선에 눈길

▲ ⓒ픽사베이

[PD저널=김훈종 SBS PD(<최화정의 파워타임>연출)] 지난 7일 영화 한 편을 봤다. 한 해가 다 가려면 아직 358일이나 남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영화는 2019년 최고의 영화 세 편 안에 반드시 들 것이다!’ 스크린 위로 <THAT OLD BLACK MAGIC>의 선율이 흐른다. 어느새 나는 마법처럼 1962년, 미국 뉴욕으로 날아간다.

여기 천재 뮤지션이 한 명 있다. 그의 이름은 돈 셜리 박사. 내가 코를 찔찔 흘리던 나이 아홉 살에, 그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내가 여드름을 열심히 짜며 오락실을 들락거리던 나이 열여덟에, 그는 보스톤 팝스 심포니에 데뷔했다. ‘부와 명예’ 그야말로 모든 걸 거머쥔 이 남자!

그런데 딱 하나 이루지 못 한 게 있다. 켄터키, 테네시, 뉴올리언스 등 남부로 연주 여행을 가는 것이다. 이미 실력과 인기가 검증된 최고의 연주가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겠지만, 돈 셜리 박사는 흑인이었다. 1875년 노예 해방이 선언되었지만, 로자 파크스 사건은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1955년에 벌어졌다. 로자 파크스 사건에서 멀리 지나지 않은 1962년의 미국은 여전히 식당에서, 버스 안에서, 극장에서, 공원에서 심지어 공동묘지에서까지 차별을 광포하게 강요했다.

짐 크로우 법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던 그 시절, 돈 셜리 박사는 토니 발레롱가를 매니저 겸 경호원으로 채용한다. ‘떠벌이 토니’란 별명답게 토니 발레롱가는 허풍과 주먹이 전부인 다혈질 백인이다. 둘은 남부로 공연 여행을 다니며 서로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풀고, 한걸음씩 다가가게 된다. 여기까지 줄거리를 듣고 있자면 ‘이거 완전히 클리셰 덩어리 영화 아니야?’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길 위에서 갈등과 화해가 벌어지는 버디 로드무비가 4만 7천 편 쯤 떠오를 것이요, 흑백 간의 인종을 넘어선 우정이 돋보이는 작품은 2만 8천 편 쯤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분명하게 다르다.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의 명연기는 물론이고 음악, 촬영, 풍성한 캐릭터까지 뭐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이런 장점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중요한 차별점이 하나 있다.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전복’이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그랜 토리노> <블라인드 사이드> 등 기존의 수작들이 미처 다다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했다. ‘백인은 여전히 우월적 지위에서 굽어다본다’거나 ‘흑인 혹은 아시아계 소수 인종이 받는 억압을 부숴버리는 주체는 여전히 백인이다’란 한계를 극복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수혜’라는 멍에를 말끔히 지워냈다.

피고용인이 백인이었고, 고용인은 흑인이었다. 사고를 치는 건 백인이었고, 힘겹게 수습하는 건 흑인이었다. 양 손 가득 음식을 들고 쩝쩝대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건 백인이었고, 우아한 슈트를 입고 교양 있게 식사를 하는 건 흑인이었다. 흑백의 이해와 화해는 같을지라도, 바라보고 서 있는 스탠스가 완전히 뒤집어져 있다.

라디오 프로듀서 초년병 시절 겪었던 일이 있다. 어찌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지금도 생생하다. <꽃쏘고! 닭쏘고!>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의 코너였는데, 뭔가 미안한 마음이 있는 청취자가 사연을 보내면 생방송을 통해 화해를 주선한다.

하루는 중년의 아버지가 신청을 했다. 무슨 곡절인지 이제는 연락도 못 하고 지내는 딸에게 ‘어린 시절 애비 노릇 제대로 못 한 걸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의 슬픈 예감대로 따님은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 했다. 방송 연결도 절대 하지 않겠노라 이야기하며 전화를 끊었고, 우리 제작진은 생방송을 언제언제 하니까 꼭 들어보시라고 간곡한 부탁을 남겼다.

드디어 방송 당일. 후회와 번민에 젖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전파를 탔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딸에게 전화를 걸자 놀랍게도 응대해주었다. 그녀의 음성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생방송으로 연결해 아버지와 딸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5초만 포즈가 떠도 방송 사고인 라디오였지만, 부녀는 말이 아닌 가슴으로 소통했다. 사실 그날의 방송은 앙드레 가뇽의 ‘라무르 레브’가 흘러나오는 게 전부였다. 미안함에 우는 아버지는 말을 이을 수 없었고, 딸 역시 감격에 벅차 그저 울음만을 토해냈다.

당시 생방송을 마치고 나는 부녀를 화해시켰다는 뿌듯함에 젖어있었다. 청취자들을 위해 방송인으로서 뭔가를 해주었다는 기쁨이 주된 감정이었다. 하지만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부녀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다. 내가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준 게 아니라, 두 부녀가 나에게 평생 기억에 남는 기쁨을 선물로 주었다.

오늘도 나는 매일 같이 생방송에 쏟아져 들어오는 수천 통의 사연에서 위로를 얻고 감동도 받는다. 진정 마법 같은 시간이다. 뭔가를 해주는 게 아니고 도리어 받아서 행복한 토니 발레롱가가 된 기분이다.

참! 마법 같은 영화의 제목은 <그린 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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