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체육'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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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 체육'의 폐쇄적 구조...장기적 관점의 교육 필요

▲ ⓒ Pixabay

[PD저널=김창룡 인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오래된 기억이지만 잊을 수 없는 장면. 당시 나는 일간지의 스포츠부 기자로 한 복싱세계 챔피언의 기자회견에 초청받았다. 챔피언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프로모터, 매니저 등과 기자회견 후 기자들은 마치 그 선수와 인터뷰를 한 것처럼 보도했다.

내가 의아해서 선배기자에게 물었다. "선수와 직접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고...이렇게 직접 말한 것처럼 보도해도 됩니까?"

대답이 의외였다. "걔네들 만나서 물어봐야 대답은 뻔해. 그냥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밖에 못 해. 우리가 알아서 써줘야 해."

운동선수들은 자기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기자들이 선수들의 입장을 '알아서 써주는 것'이 당시는 관행이다시피 했다. 물론 모든 운동선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감독이 다른 말을 못하도록 해서 그럴 수도 있다.

비슷한 일을 강의실에서 또 겪게 됐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두 명의 하키선수가 강의 시작 전에 "합숙훈련을 해야 하고, 경기에도 참가해야 해서 수업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학기 내내 합숙훈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경기가 매번 있는 것도 아닌데, 가능하면 수업에는 들어와야 하는데…. 앞으로 평생 운동만 할 것도 아니고, 가정을 갖게 되면 남편이나 자녀와 소통을 해야 하는데 본인의 미래를 위해 강의를 듣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한 학생이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강의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학점을 주지 않아도 학교에서 알아서 처리해줬다. '체육특기생'으로 이미 초중고 시절부터 운동만 해 온 선수들이었다.

심석희, 신유용 등 엘리트 운동선수들에 대한 야만적 폭행과 성폭력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체육계의 고질적인 병폐도 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대한체육회나 빙상연맹, 유도협회 등은 뒤늦게 징계를 내리는 등 위기모면에 급급하고 있다.

엘리트 체육의 구조를 바꾸고 생활체육을 활성화하겠다고는 하지만 일선 교육현장에서 얼마나 수업시간이 준수되고 있는지, 어떤 편법이 동원되고 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대학 특기생 입학과 병역특혜라는 파격적 대우, 연금수혜 등 여전히 스포츠 국가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한 엘리트 체육의 부작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운동부가 되면 초등학교부터 국가대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합숙소에서 보내야 하는 훈련체계에도 개선의 여지가 없는지 살펴 달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선수들을 운동기계로 만들며 '금메달을 향한 집념'을 홍보하는 행태가 엘리트 스포츠 교육이다.

운동기계가 된 선수들의 가장 큰 고통은 스포츠 외엔 타인과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운동장을 떠나 평범한 생활인이 되었을 때 이 같은 문제가 개인의 불행이나 비극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가해자가 떵떵거리고 피해자가 숨어서 고통 받아야 하는 기막힌 일은 성폭력의 세계에서는 현실이다. 최근 피해 사실을 밝힌 이들이 가해자를 처벌하는데 성공하더라도, 본인에게는 상처와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 이를 지혜롭게 극복하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 따로 마련돼야 한다. 

스포츠계의 폭력 전수조사와 처벌은 필요하지만 공개조차 하지 못하는 피해자들, 미래의 잠재적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 교육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정상적인 교육기회를 갖지 못한 스포츠인들을 위한 소통, 심리, 교양 등 다양한 맞춤형 프로그램이 절실하다. 이는 개인의 불행을 예방하고 가정을 지키는 교육투자가 될 것이다.

또 하나, 무엇보다 스포츠를 직업으로 선택한 자식들의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스포츠에 올인하는 자식을 위해 감독 찾아다니며 대접하는 일 대신, 소홀해지는 독서와 교육을 어떤 형태로든 보완해야 한다. 메달에도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법과 제도에 앞서 부모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녀의 교육을 함께 고민하고 도와야 한다. 자녀를 자랑거리로 삼으려고만 하는 부모는 그 때문에 훗날 눈물로도 고통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스포츠 선수로서의 생활은 짧고, 인생은 길다. 인생의 지혜를 길러주는 것은 경험과 독서, 교육이다.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은 세월이 흘러봐야 알 수 있다. 먼저 삶을 살아본 부모가 이런 생활의 기본을 자녀에게 적용하는 용기와 지혜를 먼저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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