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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죄가 없다

[비필독도서⑪]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오학준 SBS PDl승인2019.02.18 17: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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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그것이 알고 싶다>연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같이 거리에 나섰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선 이들은 때로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변화를 요구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판결은 결국 해를 넘겨서야 나왔지만, 이미 이들은 처음부터 대통령의 어떤 변명도 들을 마음이 없었다. 그가 대중의 대표로서 지녀야 할 권위와, 대표로서 얻어야 할 신임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탄핵이라는 초유의 상황과 뒤이은 얼마간의 혼돈의 시기가 지나고 의욕적인 새로운 정부가 등장했다. 새로운 정부가 내세운 가치들은 거리에 나선 이들을 만족시킬 만큼 선명해보였고, 그 실현 의지 또한 확고해 보였다. 조금 불안한 움직임도 보이긴 했지만, 공식적인 ‘전쟁’은 끝났고 남은 것은 정책의 공학적인 조율과 실행에 불과한 듯 보였다.

하지만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다수의 극단적인 발언들과 탄핵의 대상이자 적폐로 불리던 이들에 대한 ‘재평가’를 마주하다보면, 위기는 여전해 보인다.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킨 주역이었던 이들의 발언과 평가 속에는 새로운 정권이 자신의 분노와 열망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실망감이 가득하다. 이런 실망감은 손쉽게 극우파적 선동가들의 ‘사이다’ 발언에 휩쓸리곤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분노는 모순적이고 부당한 것일까. 종종 인종차별적이고 국수주의적이며, 동시에 여성혐오적이면서 노동자를 경시하는 듯한 태도들에서 굳이 일정한 가치들을 건져내는 건 무의미한 일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을 과격한 극단주의자들의 억지라고 손쉽게 기각하기에는 그 휩쓸린 열망의 규모는 작지 않고, 일시적이지도 않다. 해결이 필요한 문제다.

책장을 뒤적거리다 샹탈 무페의 책을 꺼내든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약간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그는 이론가지만 동시에 이론적 작업으로 특정한 정치적 국면에 직접 개입하는 운동가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펴낸 대표작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도 2차 대전 이후 유럽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대응 중 하나였다.

그들은 그 책에서 2차 대전 이후 마주한 자본주의 고도성장의 종말과 그에 따른 사회적 합의의 붕괴,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도시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인종차별 반대운동 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당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대안이 없다’며 수용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한 구상을 포기하는 상황을 비판하고자 했다.

▲ 상탈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이 책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라는 책 역시 비슷한 동기에서 쓰였다. 저자가 보기에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그 해결과정에서 보여준 엘리트들의 무능력과 무책임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가 대중들의 분노와 욕망을 적절히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은 여전히 미지수인 상태로 있다.

저자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인터레그넘(interregnum)’ 개념을 인용하며 상황을 설명한다. 인터레그넘이란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게 만들어주던 법적‧제도적 틀이 그 효력을 다했음에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틀이 없거나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무페는 바로 지금이 그러한 상황임을 다양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지금 도래한 이 인터레그럼 상황에 ‘포퓰리즘적 계기’라는 이름을 붙인다. 기존의 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여명과도 같은 상황에서, 적과 아군을 나누고 그렇게 나눔으로써 아군을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하는 ‘패배자들의’ 동원 전략으로서의 포퓰리즘이 다양한 정치 집단에 의해 사회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동원 전략은 어느 정치 집단에 의해서든 비슷한 형태로 구성된다. 현재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으며 그 위기를 초래한 자들은 소수 특권층이나 엘리트들이며, 그들로 인해 차별받는 대중의 이름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이 포퓰리즘적 계기에서 가장 먼저 승기를 잡은 쪽이 국수주의나 인종주의를 내세운 극우파라는 점이다.

사실 멀리는 장 마리 르펜, 가까이는 독일 대안당의 약진과 트럼프의 당선과 같은 사건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건 더 이상 의외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현재 민주주의가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으며, 이는 소수의 특권층 또는 책임감이 없는 외부인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국민만이 정치적 주체로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극우파들은 지금의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불만을 가진 이들에게 그 불만을 설명할 자신만의 언어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명확한 적대가 설정되고, 불만의 원인을 명확하게 짚어내며, 그리하여 ‘우리편’이라는 소속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포퓰리즘 전략을 활용한다.

무페가 보기에 이런 극우파의 약진을 막는 데에 기존의 좌파들이 접근하는 방식은 무력하다. 이들은 정치의 영역에서 적대를 걷어내고, 모든 문제를 공학적인 문제 풀이의 차원으로 환원시켰다. 게다가 극우파들의 황당한 주장을 지지하는 대중의 무지함을 지적하는 것은 결국 정치의 주체인 대중의 열망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않으려는 반정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이에 무페는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제레미 코빈이 이끄는 영국 노동당,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같은 종류의 정치적 시도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실체로서 순수한 국민을 강조하고, ‘오염’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추동하려는 우파적인 접근을 경계한다. 그러면서 대중의 정치적 열정을 이해하고,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대응할 수 있는 다수 대중의 연합을 형성하자는 좌파적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포퓰리즘적 계기’를 활용하는 도박을 벌여야 한다고 말이다.

이 책의 장점은 포퓰리즘을 조금 더 가치중립적으로 보고, 이 전략을 활용해 주어진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해보게 한다는 데 있다. 대중이 없는 정치는 정치일 수 없다. 하지만 대중은 임의적이고 정서에 휘둘리기 쉽다. 또한 노동자 계급과 같은 점지된 구원자는 더는 없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더 전면적으로 확대하자는 공통의 요구는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미투운동’을 옹호하면서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이 있고, 민주공화국의 국민 주권을 찬양하면서도 이주노동자와 난민 문제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정권 창출에 도움이 되었던 이들이 어느 국면에선 정책 실행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어느 부분에선 갑인 동시에 을이듯, 모순적인 태도는 어쩌면 대중의 본질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

모순이 존재하는 한 우파 포퓰리즘은 언제든 새롭게 태어날 자양분을 가지고 있다. 2018년 말 치러진 스페인 총선에서 극우파 정당이 포데모스와 함께 원내 5당을 차지한 사실은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기획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환의 시기에 미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을 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미래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간다. 그것이 노학자만의 우려는 아닐 것이다.

 


오학준 SBS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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