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PD와 DJ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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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PD와 DJ의 관계
[라디오 큐시트] 음악을 매개로 한 백아와 종자기의 우정...PD와 DJ의 이상적인 케미스트리는
  • 박재철 CBS PD
  • 승인 2019.04.0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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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거문고 현 위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얹어 놓고 백아는 잠시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고른 이 음(音)이 종자기에게 어찌 다가갈지. 백아의 기쁨, 백아의 슬픔이 오롯이 그 음에 실려 종자기에게 가닿을지.

춘추전국시대, 백아 앞에서 귀를 기울이는 청중이 수천수만이어도 단 한 사람, 오직 한 사람의 귓바퀴로 흘러 들어갈 음만을 백아는 고르고 또 골랐을 것이다.

목적지가 정해진 기차처럼, 백아의 관심은 종착지인 종자기에게로 정확히 향해 있었을 것이다. 그 둘의 아름다운 사랑 같은 우정을 우리는 지음(知音)이라는 고사로 전해 듣는다.

시나 학문도 아니고 요리나 의류도 아닌 음악이었기에 둘의 우정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문학이라면 해석차가, 학문이라면 견해차가, 요리나 의류라면 기호차가 분명 그들을 머잖아 등 돌리게 했을 테니 말이다. 그랬다면, 가라진 틈에서 들어오는 겨울 웃풍마냥 몇 겹의 덧댄 옷으로도 막을 수 없는 냉기가 둘 사이에 흘렸을 법하다. 그런데 음악이라서, 음악이 매개라서 ‘우정’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후세에 전해져 이렇게 남게 됐다.

언어가 달라도 세대나 성별, 풍습과 체제가 달라도 음악은 시공을 거뜬히 뛰어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생각해 보라. 광장에 모여 같은 곡에 입을 맞춰 노래를 부르다보면 생면부지의 사람과도 자연스레 어깨를 걸게 된다. 손을 맞잡게 된다.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로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옆으로는 유대감이 전염된다. 짐작컨대, 애국가나 찬송가가 없었다면 국가나 교회의 결속력은 분명 지금보다 한결 헐거워졌을 것이다.

‘음악을 알아보는’(知音) 칩이 태생부터 우리의 DNA에 깊숙이 박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음악이 있기에 백아와 종자기는 남부러운 우정을 얻게 됐다.

매일 큐브와 같은 부스로 자진해 들어가는 수인(囚人)들처럼 PD와 DJ는 정해진 시간에 한곳에 묶인다. 그래, 이왕 묶일 운명이라면 음악으로 묶이길 꿈꾼다. 지음처럼 엮이길 희망한다.

백아의 선택이 종자기의 미감(美感)을 북돋아 줬듯 PD의 선곡이 DJ의 감성을 일깨워 주길 원한다. DJ의 멘트가 PD의 탄성을 자아내길 바란다. 백아가 종자기의 안색을 살폈듯 PD는 첫 번째 청취자인 DJ의 반응을 살핀다.

하여, 흐트러진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음악으로 가다듬어지길 기대한다. DJ는 전체 선곡표의 뜻을 헤아려 주고, PD는 프로그램의 진행이 농익기를 지켜봐주고, 그 둘은 그렇게 음악으로 밟아왔던 시간들을 조용히 함께 뒤돌아보길 상상해본다.

백아와 종자기? 너무 나간 것일까. 보고 싶은 사람 못 보는 고통보다 보기 싫은 사람 보는 고통이 더 크다 했다. 전자는 떠올리는 ‘낭만’이라도 있지, 후자는 떠올릴수록 ‘낭패’다. 한쪽은 채권자요 다른 한쪽은 채무자라 매일 대면하는 일이 어깨에 벽돌 하나를 올려놓는 일이 되기도 한다.

백아와 종자기라. 현실은 그 반대이고, 현장은 그 이상이라는 냉소가 들린다. 허나, 진창에 발을 딛고 있어도 눈은 별을 바라봐야 한다 했다. 오늘도 덩그러니 찬밥처럼 부스에 담긴 제작자라면 언젠가 찾아올 나의 ‘지음’을 꿈꾸길 멈추지 말자. 백아와 종자기를 떠올리며, PD와 DJ의 이상적인 케미를 그려보며 오늘도 콘솔에 가느다란 손을 올려놓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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