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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만드는 PD야말로 진짜 왕(王)이다
안경은
  • 승인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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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필자 안경은 pd는 지난 3월 31일 명예퇴직으로 kbs를 떠났다. 73년 kbs 공채 1기로 입사해공주방송국 방송부장, 1·2라디오 부장, 라디오 제작위원을 역임했으며 [마이크 현장], [라디오 응접실], [책마을 산책], [역사탐험]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여의도를 떠난지 두달, 25년의 pd생활을 정리하며 후배 pd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지로 적었다. <편집자>
|contsmark1|어디 갈 데도 없이 100:1입네 1000:1입네 하는 pd를(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이 imf시대에) 그만두고 나온 저를 두고 어떤 사람은 ‘대단하다’하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또라이’라고 합니다. 종합하면 결국 ‘대단한 또라이’로 귀착됩니다. 이 원망을 저는 이제 우리 pd들한테 쏟아부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우리 pd들이거든요.
|contsmark2|일제시대는 물론이고 박정희, 전두환때 ‘이 지경’이 된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가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안에서 쇠창살 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감옥만 나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그 희망으로 살았습니다.그런데 막상 감옥문을 나와보니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독재자가 만들어 놓은 나쁜 공기가 이미 푸른 하늘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죠. 지금 이 땅에는 아무데서도 맑은 공기를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땅은 썩어가고 있습니다.독재자가 물러났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그들이 버려 놓은 황량한 땅을 가꾸어야 했습니다. 독재자와 싸울 때의 그 강인한 투지보다 더 집요한 노력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땅 한 평 가꿀 생각은 않고 서로 남의 땅 뺏기에만 정신이 없었습니다. 빼앗아서 먹고 빌려서 먹는 사람만 있었지 생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imf.
|contsmark3|정권교체가 중요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옛 정권이 도둑질 해 논 창고를 풀어 모든 것을 제자리로 갖다 놓기는커녕 그 창고를 그대로 차지한 채 창고를 관리하던 그 창고지기들을 노하우란 이름으로 또 쓰고 있습니다. 독재자의 편에 서서 자기들을 핍박하던 그 창고지기들을 지연입네 학연입네해서 또 쓰고 있습니다. 그대로 남은 그 사람들은 다시 옛날처럼 살고(노하우) 세상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있는데 정권교체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패와 획일주의, 적당주의, 노예근성이 지금 우리들 삶의 패러다임이 돼 있습니다. 생산의 논리보다는 탈취의 논리만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contsmark4|이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색깔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꼭같은 까만색끼리 너냐 나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파란 색깔의 우리를 찾아야 합니다. 파란 색깔의 우리를 찾아서 칭송하고 검게 살아 온 우리가 파래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야 합니다. 문화를 만드는 일입니다. 문화가 척박한 땅에 결코 아름다운 사회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윤이 나는 경제나 빛나는 정치는 더군다나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문화는 버려놓고 정치·경제만 모두 바라보고 있으니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따로 있겠습니까?지금은 특정인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 후보자도 지방자치 후보자도 여론조사를 통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이제 대통령은 아무나 뽑아도 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결정은 모두 여론조사를 통해서 대중이 하니까요.이 대중이 바로 우리 pd들의 몫입니다. 대중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를 우리 pd들이 잘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contsmark5|우리 대중은 최소한 100년간(일제침탈 이후) 역(逆)의 논리로 살아왔습니다. 거꾸로 가는 논리만이 살아남는 절대절명의 요체였으니까요. 거짓말을 일삼고 동포(이웃)를 배반하고 자존심을 확실히 버려왔습니다. ‘의식있음’은 오늘 이 땅에서 여전히 터부시되고 있습니다. 역사의식은 식민의식에 자리를 빼앗긴 채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습니다. -친일식민사관.여기서 저는 남들이 전혀 자랑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랑하나를 해야겠습니다. kbs 1라디오에는 [역사탐구]라고 늦은 밤 매일 15분간씩 방송되는 역사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이 시간은 흔히 예상하는 대로 강단역사학자들만 담당해왔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어이없게도 우리 나라의 역사교수들은 패거리 의식에 묶여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해 이 프로그램에서 근 5개월 동안 강단역사학자들을 배제한 채 재야(在野)와 비(非)역사분야의 학자들만으로 바른 역사를 찾아내느라 골몰한 적이 있습니다. 교수 한 명 불러 그냥 맡겨만 놓아도 되는 것을 닷새가 멀다하고 새로운 분을 찾아내고 또 시간 맞춰 편집하느라고 노트에 적어 가며 보통 고생한 게 아닙니다.
|contsmark6|저는 pd들에게 꼭 말하고 싶습니다 기존의 체제나 형식적인 질서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입니다. 기득권 층에 안주하기 십상인 교수들에게도 의존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젠 우리 문화를 바꾸어야 합니다. 태산같은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있는 우리가 이제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정치도 경제도 살아 날 수가 없습니다.문화를 바꾸는 이 막중한 역할이 우리 pd들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떠난 저는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만 imf도 문화의 소산이고 저를 대단한 ‘또라이’로 보는 시각 또한 문화의 소산일진대 저는 우리 pd들에게 원망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를 만드는 우리 pd들은 우리의 정치·경제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진짜 왕(王)들입니다. 이 진짜 왕을 싫다고 떠난 저는 왕보다 더 나을 것 같지만 극(極)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저는 다시 맨 밑자리로 돌아가 우리 pd들을 지켜 바라 볼 뿐입니다.아무쪼록 건투하시어 이 나라를 살려 내 주시기 바랍니다.
|contsmark7|1998년 5월|contsmar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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