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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망명은 끝나지 않았다

|contsmark0|이번호 여의도 초대석은 광주로 자리를 옮겼다.5·18항쟁의 마지막 수배자였고, 12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 끝에 지난 93년 귀국, 광주에서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해 5·18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윤한봉 씨. 그를 연합회 사무처장인 박종성 pd가 만났다.연합회 박종성 사무처장은 90년 kbs에 입사하여 라디오 pd로 일해왔고, 현재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맡고 있다.<편집자>
|contsmark1|80년 5월 광주의 마지막 일 주일 동안 그는 광주에 없었다. 그저 ‘참담한 심경으로 (봉쇄망을 뚫지 못하고)나주 시내를 서성거리며 자신을 욕하고 꾸짖었다’고 뒷날 밝히고 있다. 이 달 27일 새벽, 전남 도청이 함락된 후 현상 수배자로 숨어 지내다가 이듬해 4월 그는 미국밀항을 결행, 미국의 한국인 정치망명자 1호가 된다. 93년 그가 귀국했을 때에야 비로소 많은 사람들은 ‘밀항자 윤한봉’의 존재 혹은 12년간의 부재를 알게 된다.… 어디에 있었느냐 그 새벽 네 이름을 부를 때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임철우는 결정적인 순간에 현장을 비운 죄책감이 일생을 통해 갚아야할 도덕적 채무가 되었음을 그의 장편소설 ‘봄날’ 전권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광주는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다시 무섭게 호명했다. 그들의 삶을 견딜 수 없이 무거운 것으로 만들었다. 빅터 프랭클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삶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를 끊임없이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의 생명은 건져진 그 순간 저당 잡혔다. 윤한봉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스스로 도망자란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망명기간동안 단 하루도 허리띠를 끌르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 불편한 잠자리에서 그가 꾼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책 ‘운동화와 똥가방’을 보면 ‘용서받을 만한 실적’을 남기고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쓰여있다.dj 집권과 광주문제 해결을 등식에 놓는 현행의 정치적인 계산법 속에서 그의 ‘국외 실적’은 용서는커녕 주목의 대상감도 안되어 보인다. 그러니 어떻게 용서를 받을 것인가. 하기야 그의 입장에서는 ‘광주’라는 원 채권자가 나서지 않으니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 잡지 못한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직도 도망자의 몸이다. 5월 광주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의 계속되고 있는 망명이 확인시켜 주길 바라며 그를 만났다.
|contsmark2|- 올해 5·18을 맞는 감회는. 속이 몹시 상한다. 전·노의 사면 복권 때문에 기분이 아주 나쁘다.- 5·18은 dj가 대통령 이 된 후에 처음 맞는 것인데. dj 집권으로 광주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한다면 dj 때문에 5·18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과 똑 같다. 5·18은 광주·호남 지역의 문제가 아니었고 전국적인 발생 배경을 갖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70년대 투쟁의 연장인 그때까지의 투쟁과정에서 집중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5·18은 3·1운동이나 4·19처럼 민족 운동사적 입장에서 보아야한다. 호남이라는 지역이나 특정 정치인의 좌절이라는 동기를 부여한다면 5·18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당선이 이 지역의 오랜 한씻음을 대리한 것은 부인 할 수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지역주의적인 시각에서라면 그렇다. 그러나 80년 이후의 민주화 운동을 한번 생각 해보자.5·18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많은 분신, 투신, 옥사들…. 광주는 당시의 사상자들, 유족들, 광주시민, 전남 도민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 국민이 공유하고 계승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5·18이 국가 기념일이 된 게 아닌가. 이 지역 출신 대통령만이 5·18문제를 해결 할 수있다는 것,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지역주의는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내고 강화시킨 것 아닌가.‘정권’이 그랬지 영남사람들이 그런게 아니었다. 정치인들이 가장 수월한 득표의 수단으로 지역주의를 택한 것이다. 한풀이 정서는 그런 정치적 획책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dj가 집권했으니 지역주의가 약화될 것으로 보는가. 아니다. 아마도 다음 대선(대선이 남아 있다면)은 가장 치열한 지역주의의 대결의 장이 될 것이다.- 5월 광주 마지막 현장 부재자로서 갖는 부채의식에 대해. 당연히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정말 열심히 민주화 운동을 했다. 그러나 나는 5·18이 나기전 유신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지금까지 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 왔다. 80년 광주는 그 한 복판에 있다. 단순히 그 당시 현장에 있었느냐 없었느냐 보다 내가 그 전, 그 후 운동가로서의 일관성, 연속성을 유지해왔느냐가 내게 (더)중요하다.- 그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미국 내에서의 활동은 광주의 연장이라고 봐야 하는가.이념적인 면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활동 내용에 있어서는 변화가 있었다. 내 중심에는 항상 조국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사회를 외면하고 자국(민)문제에만 빠져있다보면 활동 영역이 협소해진다. 미국내의 다양한 단체들이나 비슷한 처지의 소수민족들과 연대해서 활동해야 했다. 세계에는 광주문제와 유사한 문제들이 많았고 우리민족보다 더 힘든 처지에 있는 민족도 많았다.- 스스로에게 변화가 있었다면.정부 혹은 권력이라는 것과 일반 시민들을 분리시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회를 정치로만 환원 시켜 보지는 않게 됐다. la폭동같은 것도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흑인의 정치적인 봉기나 백인 주류에 의해 교묘하게 통제된 한·흑 인종갈등이 아니었다. 전혀 정치적인 구호나 함성이 없는 글자 그대로 폭동이었고 약탈이었다. 거기에는 가난한 백인형제들도 참가했고 우리교포가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은 폭동지역에 상점을 갖고 있어서였지 흑인 형제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노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우리를 도운 가난한 시민들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정치와 무관한 것들이었다.- 귀국 후에 광주에서 민족미래연구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는데 미국내 활동의 연장인가.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생각의 연장일 수는 있겠지만. 연구소를 세운 목적은 현실문제를 객관적이고 냉정히 파악, 투쟁 일변도의 운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일단 기존의 정치집단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내가 귀국한 후에 보니 광주는 엄청나게 보수적인 도시가 되어있었다. 광주시민 95%가 국민회의 당원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누가 해도 안되는 전·노 사면이 dj가 한다니까 된다는 게 지금 광주의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절대 정치발전을 이룰 수 없다. 대안적 정치 세력이 나와야 한다. 이런 생각, 주장 때문에 욕 많이 먹고 있다. 80년 5월 광주는 빛나는 진보의 도시였다. 5·18정신이란 결국 진보의 정신 아닌가. 지역주의라는 비이성이 타파되지 않으면 5·18성지라는 말이 무색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진보는.참된 진보는 생태계까지 아우르는 넓은 것이 되어야한다. 생명 문화 복지를 바탕에 두고 정치적 민족적 발전 및 국제연대까지 도모하는 드넓은 개념이다.
|contsmark3|역사학자 막스 갈로는 ‘묘지로 둘러싸인 길은 정의를 향해 뻗어 있다’는 장 조레스의 말에 회의를 나타낸다. 그는 ‘이 죽음의 세기에서 승리자는 정의가 아니라 음모, 위선, 냉소주의, 침묵, 희생자들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라고 말한다.80년 5월 광주는 철저히 차단 당한 ‘폭도’의 도시였고 분노와 공포가 지배하는 ‘폐소’였다. 마지막 날 도청에서 사람들은 역사를 믿으며,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광장’을 꿈꾸며, 죽어갔다. 그리고 작년 말 사람들은 다시 그날처럼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오랜 세월 그들의 대리전사였던 dj의 승리는 확실히 5월 광주가 거둔 빛나는 정치적 전과였다. 그러나 광주사람들의 환희와 그것을 ‘지역’으로 밀어 넣고 에워싼 차가운 질시와 냉소, 그 경계면에서 숨막히는 봉쇄, 그 5월의 ‘폐소공포증’의 징후를 여전히 느낀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전·노 사면이 가능한가. 왜 죽은자들의 염원은 항상 비문(碑文)과 수사(修辭)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지난 18년간 광주는 어떤 의미로든 광장으로 한 발짝도 걸어 나오질 못한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정치에 좌초되어 있었다.윤한봉은 전라도 사람이다. 선거 때마다 쏟아진 dj지지율 구십 몇 퍼센트를 비난 하진 않는다. 단지 그것을 ‘이유’ 있는 것으로 만들라고 한다. ‘호남 대통령’ 만들기 용이 아닌 민주화와 개혁에 복무시켜야하고 진보를 위한 동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주’를 포위하고 있는 악의의 벽을 허무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고 외친다. 그는 묘지에 싸인 길이 정의로 향하기 위해선 정치나 거래가 아닌 ‘이성’에 의해 닦여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가 도망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누가 뭐래도 5월 광주의 적법한 계승자중의 하나이다.
|contsmark4|그다지도 많은 일을 겪은 뒤에, 그다지도 머나먼 거리를 지나온 뒤에,어떤 왕국인지도 모르고, 어떤 땅인지도 모르는 채,가련한 희망을 갖고 돌아다니고,속이는 동료들, 수상한 꿈과 더불어 돌아다니고 나서,나는 아직도 내 눈속에 살아있는 단단함을 사랑한다…- 파블로 네루다 詩 ‘소나타와 파괴’ 중에서|contsmar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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