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자신인 ‘가시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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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자신인 ‘가시나들’ 
달콤한 호평 받았지만, 화면 뒤의 현실적인 고민들
  • 권성민 MBC PD
  • 승인 2019.06.14 1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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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권성민 MBC PD] 노소물. 없는 말이다. ‘노년과 소년물’을 내 멋대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말 그대로 인생 끝자락의 노년과 인생에 첫발을 디딘 소년의 우정을 다루는 서사를 말한다.

<시네마천국>이 대표적이고, 디즈니의 <업>도 비슷한 맥락이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프랑스 영화 <버터플라이>나 스페인의 <마리포사> 같은 영화도 좋아한다. 서로의 삶에 닮은 구석이 많지 않아 보이는 둘 사이의 우정은 끌리는 데가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할리우드에서 심심찮게 다뤄지는 ‘커다란 동물과 소녀의 우정’, ‘거대한 로봇과 소년의 우정’ 같은 서사도 비슷한 지점에서 끌린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들의 시를 만나다

의무교육이 시행되기 이전에 유년기를 보내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이들을 위해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성인문해학교’ 사업을 시작한 건 2006년이다.

이 사업이 정착하고 성과를 내기 시작했을 무렵인 2010년대 즈음, 인터넷에는 심심찮게 할머니들이 삐뚤빼뚤 힘주어 쓴 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글이라고 부르기엔 차라리 몇 개의 글자라 할 수도 있을 만큼 짧은 시들 속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낀 것은 나뿐이 아니었을 거다.

삶이 쌓인 만큼 마음속에 말도 많이 쌓였는데, 이를 담아낼 수 있는 문자를 배우지 못했던 이들이 뒤늦게 글을 배워 꺼내놓은 언어의 깊이는 한 두 호흡에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 시들을 처음 봤을 때는 ‘문해학교’의 존재조차 몰랐다. 어디선지 모를 시 쓰는 할머니들의 놀라운 힘에 감탄했을 뿐.

<칠곡 가시나들>에서 <가시나들>로

그리고 PD로서 나만의 기획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노소물'을 좋아했던 만큼 노년층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할머니와 늘 친구처럼 지내는 연인을 보면서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인의 할머니는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다. 세대가 다른 만큼 모든 말과 행동이 예측을 벗어난다. 그 뜻밖의 순간들이 때로는 재미있고, 때로는 생각거리를 준다. 그 자체로 좋은 콘텐츠다.

비슷한 걸 느낀 이들이 많은지 곳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다룬 방송과 유튜브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10대~30대는 그 부모가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맞벌이를 시작한 세대고, 때문에 주 양육자가 조부모가 된 세대다. 그만큼 노년층은 더 가까워졌다. 누군가의 할머니이고, 누군가의 어머니이며, 그 자신이다. 

그러던 중 김재환 감독님의 <칠곡 가시나들> 제작 소식을 들었다. 시 쓰는 할머니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반가웠다. 마침 김재환 감독님과 개인적인 연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전화를 걸어 나도 그 소재로 방송을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사실 방송계에서는 소재가 겹쳐도 개의치 않고 비슷한 걸 만든다. 영화나 드라마를 차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예능 프로그램끼리도 복제와 재생산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베꼈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영화와 같은 소재로 기획을 할 거라면 차라리 감독님과 협력을 해서 공식적인 연작을 만들자. 그렇게 파일럿 예능 <가시나들>의 기획이 시작됐다.

다큐멘터리는 할머니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담아냈지만, 예능은 다른 포인트가 필요했다. 사실 다큐멘터리와 예능이란 장르를 나누는 기준이란 딱히 존재하지 않지만, 그나마 가시적인 것 중 하나는 ‘연예인’의 출연 여부일 거다.

할머니들 옆에 연예인 짝꿍들이 함께 한다면 좀 더 예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이 짝꿍이 될 것인가, 선생님은 누가 맡을 것인가, 명분은 무엇인가 하나하나 고민해가며 모양을 만들어갔다.

지난 9일 종영한 MBC 4부작 파일럿 '가시나들'. ⓒMBC
지난 9일 종영한 MBC 4부작 파일럿 '가시나들'. ⓒMBC

우여곡절, 고군분투

그렇게 준비해간 기획안을 받은 부서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노인들이 나오는 콘텐츠는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설득을 하려면 다른 근거들이 필요했고, 그 중 제일 좋은 건 돈이었다.

영화 제작사를 외주사로 계약해서 MBC 자격으로는 받기 어려운 지원 사업들에 공모해보겠다고 했다. PPL이나 협찬을 끌어오기도 수월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연출과 제작은 MBC 안에서 다 하되, <칠곡 가시나들>의 제작사가 비용을 집행하는 외주 제작사가 되기로 했다.

어렵게 제작 허락을 받자 이번엔 다른 문제가 생겼다. 처음 4회짜리 파일럿을 생각하고 준비한 기획을 2회만 제작하라는 거였다. 시청률이 잘 나올 것 같은 소재도 아니고, 처음 단독연출을 하는 PD에게 4회씩이나 맡길 수는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4회가 필요했다.

연예인 짝꿍들과 할머니들의 관계가 깊이를 가지려면 시간이 든다. 할머니들의 언어를 시로 담아내는데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며칠의 간격을 두고 1박2일씩 두 번은 촬영을 해야 했다. 4일치 촬영은 4회는 되어야 담아낼 수 있다. 2회 만에 보여주는 건 겉핥기 밖에 안 될 거였다.

MBC가 2회로 못을 박았는데도, 제작사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4회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다. 제작사로서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4회를 기획하고 준비한 촬영이 2회 밖에 편성을 못 받으면 제작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김재환 감독님은 내가 연락하기 전에 이미 타 방송사와 <칠곡 가시나들>을 활용한 방송을 준비 중이었다. 한 시즌 12회를 보장해준다는 좋은 조건을 뿌리치고 정규편성은커녕 당장 회차 걱정부터 해야 하는 MBC로 온 건 그저 ‘이 기획은 권성민 PD가 제일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믿음에 보답하려면, 그리고 제작사가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잘 만들어내야 했다. 필사적인 마음이 되었다.

다행히 촬영은 잘 진행됐고, 가편집본을 본 회사 내부의 반응도 괜찮았다. 마침 <가시나들>이 들어갈 자리에 후속 편성도 준비된 게 없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물려 어렵게 4회 편성을 얻어냈다.  
  
뜨거운 호평, 차가운 시청률

방송이 나가자 당황스러울 정도의 호평이 이어졌다. 내가 지금껏 참여했던 방송 중에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언론과 평단이 한 목소리로 <가시나들>을 칭찬했다.

가장 큰 포인트는 ‘작위적이지 않고, 불편한 지점이 없는’ 예능이라는 거였다. ‘좋은 예능’을 고민했다는 평론가들이 이런 예능을 기다려왔다는 평을 내놨다. 시청자 게시판에도 정규편성을 요구하는 글이 쏟아졌다. 시청자 게시판은 보통 칭찬보다 욕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 마련인데, 이토록 호평일색인 시청자 게시판은 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매 편을 보며 끊임없이 울고 웃었다고 감상을 남겼다. 비슷한 감상을 SNS와 커뮤니티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단지 착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재미도 있었다는 평이었다. 연출자로서는 달콤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4회가 끝나도록 시청률은 끝내 3% 구간을 넘지 못했다. 덕분에 정규편성도 어려워 보인다. 동시간대에 물이 잔뜩 오른 타사의 터줏대감 프로그램이 버티고 있고, 홍보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가 나왔지만 결국 연출자인 내 부족함 때문일 테다. 2회만 하라던 부서장은 자신의 감을 다시 한 번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문법, 좋은 예능’을 환호하던 목소리는 3%쯤 되는 찻잔 속 태풍인 걸까. 대중성까지 확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배워야할 것들이 까마득하다. 다음 기회는 언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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