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3색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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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30여년 내공 쌓은 진행자 손숙·오미희·김현주, 자기만의 빛깔 발현하는 진행자들
  • 박재철 CBS PD
  • 승인 2019.08.20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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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라디오 연출자로 일하면서 만났던 진행자 김현주, 오미희, 손숙 선생님.
CBS 라디오 진행자로 큰 사랑을 받았던 DJ 김현주, 오미희, 손숙.

[PD저널=박재철 CBS PD] 프랑스 국기는 단출하다. 별다른 문양 없이 삼색이 나란히 놓여있다. 블루, 화이트, 레드가 도미노 칩 마냥 이웃해있다. 프랑스 혁명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를 각각 표상한다고 한다. 1990년대, 폴란드의 크지쉬토프 키예슬롭스키 감독은 이 세 가지 색을 영화적으로 변주해 자신의 유작을 남겼다. 강렬한 색채만큼이나 잊히기 힘든 영상 이미지를 선사했다. 내게도 이 삼색 빛깔을 띠는 세 명의 진행자와 일할 기회가 있었다. 


흰 편지지

연극배우 손숙. 문자향(文字香)이 나는 분이다. 제작진보다 늘 먼저 와 신문을 읽고 계셨다. 잡지든 단행본이든 읽을거리를 손에서 떼지 않았다. 시력을 잃을 수 있는 황반변성을 앓고서도 한결같았다. 문자중독이라서 그렇다며 씁쓸히 자가진단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4년 전 세월호 1주기 즈음 프로그램에서 추모 메시지를 부탁드렸다. 방송 당일, 부스로 들어가는 왼손에 반으로 접힌 흰 종이 몇 장이 들려있었다. 벌어진 틈으로 살짝 엿보니 손으로 눌러 쓴 편지였다. 

참사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언어를 찾느라 밤새 고심한 눈치였다. 내용은 그분의 군더더기 없는 글씨체만큼이나 담백했고, 낭독은 평소 화장기 없는 민낯만큼이나 진솔했다.

“며칠 후에 제 공연에 어머님들이 오셨어요. 연극이 끝난 분장실에서 열 댓 분의 울고 있는 어머니들을 마주한 순간, 저는 솔직히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습니다. 저도 어른이니까 용서 받을 자격 없습니다. 그냥 할 말이 없으니까 한 분씩 그 엄마들을 안아 드렸는데 모든 엄마의 앙상하게 마른 어깨가 그 분들의 일 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흰 눈송이가 지상의 슬픔을 잠시나마 덮어주듯, 하얀 손 편지에서 떨어지는 위로의 말들은 듣는 이의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스튜디오 안팎은 설원처럼 한동안 고요했고 평온했다. 

붉은 원피스

가을...가을은 단풍이다. 붉은 단풍은 그 자체로 가을이다. 어느 가을날, 짙은 단풍 칼라의 원피스를 입고 오미희 씨가 방송을 하러 왔다. 빨간색 구두와 립스틱까지 늦가을 톤으로 색조를 맞췄다. 그날은 흩뿌려진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거리를 유난히 붉게 만들었다.  

평소와 다른, 눈에 띄는 차림이라 외부 행사나 TV녹화가 있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롯이 라디오 방송 때문에 차려입은 의상이었다. 

“이렇게 가끔, 신경을 써서 갖춰 입으면 기분이 달라져요. 달라진 기분에서 매일 하는 방송이 또 달라지고. 날씨나 계절에 어울리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나만의 작은 의식(儀式) 같은 거랄까. 방송에 나름 예의를 갖추면 방송도 응답해줘요” 

반복이 주는 편안함은 같은 이유에서 지루함이 되기도 한다. 둘 사이의 가르마는 역시, 파격에 있지 않나 싶다. 빈번하지도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은 변칙을 만들어내는 능력. 파격은 단어의 뉘앙스처럼 거창하거나 급진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드 케이스를 밀봉한 비닐 팩을 여는 꼬투리, 그 꼬투리 같은 단초를 잡고 한 바퀴를 돌리면 단단히 감쌌던 비닐 팩은 벗겨진다. 일상성의 각질을 깨는 그날 오미희 씨의 작은 연출이 비닐 팩을 여는 오픈 홈으로 내게는 남아 있다. 자신의 감성을 스스로 일깨우려는 노력은 누군가의 감성도 일깨울 것이다. 오랫동안 진행자로서 사랑을 받아온 노하우는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블루진

여름의 공개방송은 뜨겁고 활기차다. 무더위를 잊으려는 듯 공개홀 안의 열기는 때론 밖을 능가한다. 한여름, 부산에서 있었던 공개방송은 그러나 초반 예열(豫熱)이 필요해 보였다. 천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당히 풀이 죽어 있었다. 객석이든 무대든 누군가가 불을 붙어주면 열기는 쉬이 펴져 나갈 텐데, 이렇다 할 계기가 없어 제작진은 애를 태웠다.  

열기는 전염되는 특성을 띠게 마련인데 첫 발화지점을 잡는 게 쉽지 않다. 그날도 그러했다. 초대 가수가 무대 위에서 열창을 하고 있었건만 객석의 호응은 크게 밑돌았다. 그런 와중에 무대 하수로 김현주 씨가 등장했다. 갑자기 두 손을 크게 흔들며 관객의 박수를 유도했다. 짙은 청바지를 입고 발을 힘차게 구르며 율동까지 더하니 눈길이 안 갈 수 없었다.  

진행자가 무대 가장자리로 나와 박수 유도를 하는 장면은 드문 만큼 꽤 낯설었다. 그 덕에 서서히 바다 물결이 일 듯 박수는 모아지고 커지면서 공개홀을 메우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박수의 물결이 높아지는 속도로 고조됐다. 과거 <젊음의 행진> 류의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 진행 경험이 만들어준 적극성이 아닐까 싶었다.

“현장은 때론 펌프 같아요. 엄청난 물을 끌어올릴 수는 있는데 그러려면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요. 낯가림이 심한 저지만 가끔 무대에서 이렇게 해요. 오늘은 청바지를 입어서 활동성이 살짝 더 커지긴 했네요(웃음)“            

교감과 공감, 누군가 먼저 손 내밀 때 그 시작이 가능하다. 쑥스러움과 번거로움을 상대해, 그 싸움에서 자주 이겼던 사람이 내민 손은 맞잡기 편하고 자연스럽다. 방송에서든 무대에서든 마음의 문을 주저 없이 두드려 서로 인사를 하게끔 만드는 좋은 에너지가 그에게는 있다.           

영화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영화 이야기로 끝맺자. 최근 개봉한 <누구나 아는 비밀>이라는 영화에 포도밭을 일구는 주인공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포도주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갓 따온 포도를 손으로 짜서 즙을 만들고는 컵에 담더니 이건 왜 포도주가 안 되는지 묻는다. 가장 중요한 게 빠져있어서 그렇다며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포도즙과 포도주의 차이를 만드는 것, 주인공은 그건 ‘시간’이라 말한다. 

세 진행자는 자신에 걸맞은 빛깔과 향기를 얻기 위해서 공히 30여 년의 숙성 시간을 거쳤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취를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었던 건 지금 돌이켜 보면 방송 제작자로서 적잖은 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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