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발견한 하루’, 학원물 외피 쓴 웃픈 우화
상태바
‘어쩌다 발견한 하루’, 학원물 외피 쓴 웃픈 우화
작가와 한판 붙는 순정만화 캐릭터...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인물 통해 통쾌함 선사
  •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 승인 2019.11.13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MBC 수목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MBC
MBC 수목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MBC

[PD저널=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어쩌다 우연히 MBC 수목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를 슬쩍 봤던 분들은 ‘또 학원물이군’ 했을 지도 모르겠다. 일단 고등학교가 배경이고, 실제로 사건이 벌어지는 대부분의 장소도 학교다.

교복을 입은 남녀 주인공과 조연들은 척 봐도 방금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선남선녀들이다. 백경(이재욱)은 순정만화에서 어딘지 반항적인 남자 주인공의 전형처럼 보이고, 여주다(이나은)와 오남주(김영대)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착한 여자 주인공과 모든 걸 다 가진 남자주인공의 캐릭터 그대로다.

여기에 이도화(정건주) 같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만화적 캐릭터까지 더해지니 <꽃보다 남자>의 F4에 캔디형 여자 주인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여기까지 들으면 너무 뻔한 설정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바로 그 뻔한 설정이 스스로 지겹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바로 은단오(김혜윤)라는 이 드라마의 실질적인 주인공 때문이다. 그는 이 전형적인 풍경 속에서 약혼을 한 백경을 홀로 바라보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각’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순식간에 다른 장면 다른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은단오는 알게 된다. 자신이 순정만화 속의 캐릭터라는 걸. 그런데 어쩌다 의식이 생겨난 은단오는 모두가 작가가 정해준 설정값대로 움직이는 이 세계를 바꿔보고 싶어진다. 이름조차 없지만 자신의 눈에 자꾸만 들어오는 한 남자아이에게 스스로 다가가 ‘하루(로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에게 변화가 생기길 기원한다. 

놀랍게도 은단오가 하루에게 의미를 부여하자 어느 순간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하루는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되고, 그 역시 의식을 갖게 되면서 두 사람은 이 순정만화 속 설정값으로부터 벗어나 두 사람만의 세계를 꿈꾸게 된다. 물론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기 시작하니 말이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은단오는 순정만화 속 뻔한 설정들과 대사들을 어쩔 수 없이 설정값대로 내뱉으면서도 작가의 빈곤한 상상력에 투덜댄다. 이 지점으로 식상한 순정만화 학원물은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바뀌게 된다.

이는 상투적인 세계에 대한 반발이고 저항이다. 은단오라는 캐릭터가 그 세계를 그린 작가에게 던지는 비판이지만, 동시에 뻔한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 대해 던지는 비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작가와 한판 붙는 엑스트라의 이야기는 마치 신의 세계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처럼 흥미로워진다. 

중요한 건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은유처럼 다가온다는 점이다. 왜 학원물을 가져왔는가 하는 의문은 아마도 지금의 학생들이 처한 현실이 순정만화 속 세상처럼 정해진 설정값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는 작가의 현실 인식 때문일 게다. 좋은 성적과 스펙을 쌓은 뒤 명문대로 가는 코스는 특정한 부류의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현실 말이다. 소수의 주인공을 다수의 엑스트라가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는 인식에서 드라마가 학원을 배경으로 선택한 게 아닐까. 

하지만 이런 현실은 단지 학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마치 ‘설정값’처럼 정해져 있고, 어떤 직업을 갖느냐에 따라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가 결정되는 사회가 아닌가. 그래서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이야기는 폭넓은 시청자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 순정만화의 외형만 보고 안을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고 지나치는 시청자가 많아서 인지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시청률은 3%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유심히 보고 남다른 의미를 찾아낸 시청자들은 은단오의 이야기가 남일처럼 들리지 않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