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연출력은 어디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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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연출력은 어디서 나오나 
[라디오 큐시트] 프로그램 기획·연출, 이야기의 씨앗인 아이디어 파종부터 발육과 성장을 따라가는 작업
  • 박재철 CBS PD
  • 승인 2019.11.1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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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노루 꼬리만큼 남아 있는 가을이다. 며칠 전, 낡은 앨범에 꽂혀있는 가을 운동회 사진을 보게 됐다. 가을 운동회, 백미는 역시 박 터트리기였다. 교육적인 효과는 아마 이것이 아니었을까.

 “정확히 던지면 반드시 열린다.”    

한 분야에서 20여년 가까이 밥벌이를 하다 보니 교육 강좌나 직업 소개 자리에 불려 나가는 경우가 간혹 있다. 항상 처음의 레퍼토리는 ‘PD란 무엇인가’다. 자장면이 나오면 나무젓가락부터 둘로 가르고 시작하듯, 정체성 규정은 이런 자리에서는 누가 뭐래도 첫 단추다. 나름 오랫동안 던진 질문이었건만 가을운동회의 박처럼 시원하게 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니 요설로 귀결된 적이 잦았다.  

“PD란 Producer의 약자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일을 하는 사람.”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하고 끝나면 좋으련만 그럼 기획은 무엇이고 연출은 또 무엇인지, 거기다 좋은 기획과 좋은 연출은 또 어떤 것인지, 설명이 뒤따라와야 한다. 몇 번의 뒷맛 쓴 얼버무림 후 나름의 답을 여기 기록해두고 싶다. 

불명료한 세상사를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오게 하는 방법 중에 ‘이야기 만들기’는 무척 유효하다. 사건을 이야기 방식으로 만들다 보면 틀어진 시각이 조율되고 뿌연 시야가 환해진다.

물론, 아무 이야기가 아니라 플롯이 있는 이야기의 경우다.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는 인과관계의 유무이니, “철수는 물을 마셨다”와 “철수는 연인의 시선을 피하려 물을 마셨다”는 철수에 대한 우리의 상황적 이해를 분명 갈리게 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이유와 배경을 부여하면 맥락이 형성된다. 그 맥락 안으로 들어가면 “아! 그래서...”, “에고, 그런 뜻이...”, “음... 얼마나 힘들었을까?” 등등의 반응들이 자연스레 나온다. 

플롯이 있는 이야기는 교감과 공감을 통해 사건의 이해를 돕는다. 인물이 놓인 처지를 일깨우며 나와 무관해 보이는 상황으로 끌고 와 함께 고민하고 몰입하게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 구성의 본령은 소설일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소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아침마다 접하는 뉴스나 사소한 하루의 대화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큰 이슈들, 그리고 종국에는 역사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위는 그야말로 이야기 형태로 구전되고 확산되며 전승된다. 예컨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오디세이>, <성경>과 <코란>도 사람들 앞에서 판소리처럼 이야기 형식으로 공유되다가 문자로 정착됐다. 

PD가 기획하고 연출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획과 연출은 또 무엇인가. 기획은 이야기를 구상(構想)하는 일, 연출은 그 이야기를 구현(具現)하는 일로 갈음이 된다. 구상은 한자말 그대로 어떤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씨앗인 아이디어를 파종하는 것에서부터 그 발육과 성장을 따라가는 작업이다. 

구현은 그 구상을 머리 밖으로 외화 시키는 일쯤이 되겠다. 힘 力자를 붙일 수 있는 영역이 연출인데, 현장 장악력이나 업무 파악력, 추진력 등이 여기서 드러난다. 통칭해 연출력이다. 머리만이 아닌 손과 발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구상은 홀로 할 수도 있으나 구현은 대부분,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한다. 협업이 필수다. 

연출은 여러 역할을 맡은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어 내어 본인이 의도하는 결과물을 얻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준이라면 PD는 좋은 플롯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이를 토대로 무언가를 구현해내는 데 능숙한 사람이라 요약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구상하고 구현해야 하는가. 좋은 이야기에는 대체로 3가지의 속성이 있다. 먼저 시의성이다. ‘지금(now), 여기서(here)’ 해야 될 이야기인지가 중요하다. 현재의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 다른 나라가 아닌 이 땅에서 제기되어야 할 이야기를 밀도 있게 구성해 건넬 때 사람들은 반응하고 응답한다. 

부쩍 늘어난 1인 가구의 변화된 생활상을 관찰 토크 예능으로 풀어낸 MBC <나 혼자 산다>나 도시 생활자의 공통된 인생 로망을 다큐 형식으로 접근해 보여준 MBN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들이 그 사례가 될 법하다.       

둘째는 대중성이다. 대중성은 흔히 대중의 기호에 부합하는 대중 추수주의와 동의어처럼 쓰이지만 그보다 외연이 넓다. 대중성은 일견 쉬운 글쓰기를 닮았다. 글을 쉽게 쓰는 건 역설적으로 더 어렵다.

복잡한 내용의 본질을 포착해 누구나 알기 쉽고 정확하게 글을 쓰는 일은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절차탁마다. 그러므로 대중성은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루는 내용의 숙지 정도와 접근 방식의 새로움이 전제돼야 얻을 수 있다.  

고전을 재밌는 요약 강의와 다방면의 토론자를 통해 소개하고 자연스레 독서열을 끌어올리는 tvN <책 읽어 드립니다>나 반려 동물을 기르는 인구의 급증 현실과 동거 불화에 이은 무책임한 유기, 그 둘 사이의 괴리를 실제적인 정보와 유익한 교육 팁으로 메워주는 EBS <세상의 나쁜 개는 없다>, 그리고 경제 문제의 해법을 오랫동안 쉽고 자세히 풀이해온 MBC 라디오의 전문 장르 프로그램인 <손에 잡히는 경제> 등은 큰 덩어리를 잘게 썰어 소화하기 쉽게 수용자에게 제공하는 대중성 높은 제작물들이다.   

마지막으로 고유성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있을까마는 기존의 것을 어떻게 결합하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이야기의 탄생은 가능하다.

젊음의 상징인 배낭여행, 그 ‘젊음’의 자리에 ‘노년’을 놓으면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까. 여행지에서 생기는 돌발적인 문제와 동료 간의 미세한 균열과 반목을 노년은 어떤 지혜로 풀어 나갈까. 그런 궁금증은 tvN <꽃보다 할배> 시리즈의 기획과 연출을 보다 유심히 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악방송의 특집 <들려오는 것들>은 내레이션 없이 인터뷰이의 육성과 효과 음악만으로 소리의 본원적인 의미를 탐색한 라디오 제작물이다. 기획물의 흐름을 이끌어 나가는 게 내레이션인데, 그 자리를 공란으로 비워 놓았을 때, 어떤 전개가 가능한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구성이다. 날카로운 메시지보다는 소리의 잔상적인 효과에 집중하는 오디오적인 실험작이다. 고유성은 이렇듯 배치와 배열의 층위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해피엔딩? 엔딩이 어디 있나요? 나는 이야기는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이창동 영화감독)
 
전적으로 동감이다.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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