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류된 기획안, ‘우울증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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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류된 기획안, ‘우울증 예능’  
심각한 우울증 현주소 알리고 싶었지만, 누군가 상처 받는 프로그램이 된다면...
  • 허항 MBC PD
  • 승인 2019.12.2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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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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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허항 MBC PD] 우울증과 예능. 상극에 있는 것만 같은 두 개념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까.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던 미션이었다. 우울증을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 말이다. 대학시절부터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관심이 많아 언젠가는 꼭 다뤄보고 싶은 주제였다. 마침 우울증에 대해 뜨겁게 회자되고 있는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본격적인 기획 단계에 돌입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비밀스럽게 앓고 있는 우울증을, 예능판 위에서 허심탄회하게 풀어보자는 것이 취지였다. 신경정신과병원에 가거나 상담을 받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우울증도 적극적인 치유활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리고 싶었다. 

운 좋게도,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분이 많았다. 이를 계기를 통해 정신과의 편견을 깨고 싶다는 의사선생님부터 본인의 우울증 투병기를 솔직하게 공개한 유튜버, 작가님들, 주변 지인들까지 자료조사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줬다.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주제를 다룬다는 것이 참 반갑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소중한 정보들이 쌓였다. 한국인의 우울증 현주소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하지만 ‘이 정보들을 어떤 식으로 다룰 것인가’ 정해야 하는 단계에서 살짝 버퍼링(?)이 걸렸다. 실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무료로 공개상담을 진행할까. 전문가들과 함께 우울증에 관한 토크쇼를 열까...여러 아이디어들을 구상해봤지만 그럴 듯한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울증이라는 무거운 테마를 예능이라는 문법에 끼워 넣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딜레마가 생각보다 컸다. 아무리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자’는 취지가 있다한들, 누군가의 아픔을 다루면서 그 사이사이 예능 코드를 곁들인다는 것이 가능할까. 단어 하나도 조심히 써야 하는 게 우울증 상담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예능 프로그램을 전체적으로 진중하고 무겁게 가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우울증에 관한 좋은 다큐멘터리나 라디오 토크쇼 등은 이미 많이 나왔다. 예능이라는 장르로 그 주제를 끌어오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그 장르의 선을 넘는 방법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방법을 찾아 헤매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연예인 두 명이 또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우울증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됐다. SNS나 미디어에서 밝고 씩씩한 근황을 보여주던 사람들이었기에 더 많은 충격을 안겼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인터뷰했던 정신과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우울증은 겉으로는 회복된 듯 보여도, 다음날 어떤 감정 상태를 갖게 될지 모르는 병이라고. 정신과 전문의들도 그 회복 추이를 예측하기 어려워 정신질환 중 가장 치료가 까다롭다는 것이다. 만약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환자가 ‘악플’이라도 받게 된다면 더 악화될 위험이 있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관심과 의욕만으로 다루기에는 우울증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주제였다. 여느 예능 프로그램들처럼 ‘쉽고 흥미롭게’ 다루려다가 정작 ‘사람’을 헤아리지 못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과 사를 고민할 정도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가볍게 ‘힘내!’라고 어깨를 툭 치는 행위가 될 것만 같았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시청률로 성공했다 해도, 누군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것은 큰 실패일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프로그램 기획은 보류하기로 했다. 한 번쯤 꼭 이야기해보고 싶은 주제인데, 내가 갖고 있는 언어와 맞지 않는 느낌을 처음 경험해봤다. 더 솔직히 말하면 조심스러운 주제를 다루기엔 내 능력치가 부족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그 분야에 이론적인 관심이 있었다 해도, 우울증 환자의 마음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나, 하는 질문에는 대답할 자신이 없다. 

언제쯤 프로그램이 만들어질지는 요원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라고, 나의 부족한 깜냥이 말한다. 혹시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할지도 모를 주변 사람들에게 연말 인사 전화나 빨리 해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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