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워터스’, 시간이라는 ‘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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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워터스’, 시간이라는 ‘빌런’
[라디오 큐시트] 가습기 살균제 사건 연상되는 미국 실존 사건 조명...시간은 왜 약자의 편이 아닌가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0.04.20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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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난 3월 11일 개봉한 '다크 워터스' 스틸컷.
영화 지난 3월 11일 개봉한 '다크 워터스' 스틸컷.

[PD저널=박재철 CBS PD] <어벤져스>에서 불문곡직 파괴자 헐크로 분했던 배우 마크 러팔로는 영화 <다크 워터스>에서는 사필귀정 교정자 롭 빌렛을 연기하며 다른 영웅상을 보여준다. 

변호사인 롭은 화학기업 듀폰이 저지른 환경오염에 맞서 혈혈단신으로 싸운다. 대부분의 영웅 서사가 그렇듯, <다크 워터스> 역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프라이팬에 사용되는 ‘테플론’이란 독성 물질의 폐해를 알면서도 거대 군단 듀폰사는 이를 숨기고 자본축적의 바벨탑을 쌓다가 단기필마의 롭을 만나 고전한다.
 
처음에 롭이 싸워야 할 상대는 분명했다. 거대 기업 듀폰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서서히 그의 적이 다른 것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바로 시간. 결코 자기편이 아닌 시간을 롭의 맞은편에 세워놓고 영화는 내내 롭의 극기적인 인내력을 보여준다. 시간에 맞서 싸우는 그의 모습은 흡사 성경의 욥을 연상케 한다. 

자료 요청에 응하며 듀폰사는 수십 년 치의 엄청난 데이터를 롭의 사무실로 배송한다. 창고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자료 더미 속에서 롭은 압사 직전이다. 방대한 시간을 요하는 작업. 그러나 그는 홀로, 천천히 종이 뭉치를 분류하기 시작한다. 서류를 훑으며 중요 대목에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본격적으로 싸움에 한발씩 내딛는다. 그렇게 들어선 이 싸움은 무려 20년간 지속된다. 본인의 결기와 주위의 격려를 퇴색시키기에 20년은 너무나 충분한 시간이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시간에 있어 여유롭다. 애가 타는 건 돈 없는 사람들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 대신 자신의 어떤 귀한 것들을 내주면서 그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시간의 통행세 같은 거랄까? 시간이라는 무정한 이 징수자는 롭에게서 가족애를 앗아가더니, 다음에는 회사 동료의 신뢰를 허물고, 결국 건강 이상으로 그를 쓰러뜨린다. 

울산의 현대차처럼 웨스트 버지니아주에는 듀폰사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의 주민들은 지역경제를 사실상 이끄는 듀폰사에 대한 공격을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여기면서 롭에게 강한 적의를 품는다. 그가 속한 로펌도 법조시장에서 의뢰 기피 대상으로 낙인찍힌다. 이쯤 되면, 진실은 은폐된 걸 드러내는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바뀐다. 

오염의 시작(소 200여 마리가 갑자기 떼죽음을 당하고), 퍼져나가는 질병(기형아 출산과 암환자가 속출하고), 쌓여가는 거짓말(듀폰사의 연이은 부정과 협박) 속에서 관객은 기시감을 느낀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와 삼성 반도체 백혈병 같은 우리 사회 미완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영화 '다크 워터스' 스틸컷.
영화 '다크 워터스' 스틸컷.

이 영화는 실화다. 더구나 사건과 연관된 실존 인물들이 영화에 출연한다. 1998년 이후 20년이 넘는 소송 사건을 소재로 리얼리티에 기반해 산업 재해의 공포감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무엇과 싸울까. 이념과 체제, 차별과 불평등, 자본과 권력? 물론 이런 대상은 영웅에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중과부적일 것이다. 영화 <다크 워터스>는 여기에 ‘시간’이라는 새로운 빌런의 탄생을 알린다. 모든 것을 녹슬게 하는 힘을 지닌 이 악당은 몇 겹의 부식방지용 스테인리스 처리도 무력화시킨다. 손바닥에서 내뿜는 장풍은 메가톤급 풍화작용의 위력을 지녔다. 모든 것을 닳고 사라지게 한다. 여기서 시간은 결코 약이 아니다. 악이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처럼, 시간에 맞서 우뚝 설 수 있는 영웅이 몇이나 될까. 적 앞에 무릎 꿇는 영웅은 우리에게 다음 영웅을 기다리게 하지만, 잊히고 사라지는 영웅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의 영웅적 저항을 멈추게 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속 진실을 찾고 정의를 구현하는 변호사 롭의 행보는 언론인이 추구해야 할 직업윤리와 가깝게 맞닿아있다. 그의 행동은 법조계가 아닌 언론계에 던져져야 할 파문이기도 하다.  

세상이 판타지인 사실을 숨기려고 미국이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는 말처럼, 세상이 비겁해져가는 사실을 감추려고 우린 롭이라는 영웅을 세워놓고 자신의 평범한 삶에 면죄부를 얻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과의 싸움에서 자주 뒷걸음친 우리들의 과오는 쉬이 떠나지 않는다. 며칠 전 4월 16일은 세월호 6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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