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로 통하는 시대, 문해력 높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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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통하는 시대, 문해력 높이기
[비필독도서 28]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0.05.01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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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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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7년째 매주 독서 토론을 하고 있다. ‘정답’을 찾으려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떤 다른 생각들이 있는지 궁금해서 만난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하나의 책 속에 수많은 결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배우며 역량을 함께 발달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다리’를 놓는 즐거움이야말로 ‘두껍게’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반면에 여기저기서 “너 난독증이냐?”라는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습들을 자주 본다. 이해가 간다. 일부러 오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적당히 이해하고 참아가며 살아갈만한 공통의 세계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상대방의 부족함을 탓하기 전에, 서로 건널만한 다리가 없음을 고민해야 하진 않나.

김성우와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리터러시’가 누군가를 깎아내리기 위한 용어로 쓰이는 시대에 읽어봐야 할 책이다. 리터러시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 혹은 자신이 잘 모르는 매체를 즐기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윤리적인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역량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리터러시는 전통적인 문자 기반 정보뿐만 아니라 이미지, 영상 등의 매체를 이해하고 활용해 소통하는 능력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리터러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범위와 구성요소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저자들은 이제 리터러시의 핵심 토대가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라고 말하기 어려워진 시대라 말한다.

김성호‧엄기호가 쓴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김성호‧엄기호가 쓴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말의 시대에선 세계가 인간에게 거는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했다. 그러나 문자를 발명하고 글의 시대가 등장하면서 인간이 지식이나 진리,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이 변화했다. 세계는 대화의 당사자가 아니라, 읽어내야 할 의미가 있는 수동적 대상이 되었다. 근대 사회의 주체는 독자의 형태를 띠게 된다.

말의 시대에서 지식의 주체는 공동체였지만, 글의 시대에 지식의 주체는 독자 개인이다. 더 이상 해석을 대신해주는 ‘구루’나 ‘공동체’는 없으며, 부서진 구루의 빈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개인만이 남았다. 독자는 누구의 도움 없이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녀야 했다. 물론 그 덕에 지식은 체계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저자들은 이제 리터러시의 토대가 글에서 영상으로 변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지금은 정보를 습득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문자보다 영상이 편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시대다, 문헌을 검색하기보다, 문헌을 다루는 영상을 보는 데 익숙한 이들에게 리터러시란 ‘문해력’ 이상의 역량이다.

문제는 이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체계의 근간이 여전히 글의 시대에나 어울릴법하다는 데 있다. 그간 학교 교육과 사회의 역량은 주어진 문장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요구하고 이를 평가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다양한 해석에 대한 두려움과 정답에 대한 교조적 숭배가 공존하는 기묘한 현상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아직 이러한 평가 체계를 바꿀만한 권력을 쥐지 못했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역량과, 실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역량 사이의 간극은 넓어졌다. 옛것은 갔으나, 아직 새것은 오지 않은 시대인 셈이다. 그러니 새로운 세대의 문해력이 낮다는 비판은 현재의 권력 불균형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대뿐만 아니라, 오래된 세대의 낮은 문해력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유튜브’에 휘둘려 깃발을 흔들고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들이 문해력을 탄탄하게 갖추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개인의 게으름이나 무능력 때문은 아니다. 그들에겐 사회적, 교육적 공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대중화된 제도적 공교육, 발달된 대중매체의 수혜를 받은 세대가 이들을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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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상매체는 직관적으로 정동을 건드린다. 의미보다는 감정을 공유하기 쉽다. 특히나 지금처럼 개별 주체들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도약’없는 공감은 분명 위험하다. 그러나 이것이 리터러시의 위기인가. 단지 리터러시의 토대가 변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멀티-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저자들이 보기에 리터러시를 개인이 쌓을 수 있는 수치화된 역량으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인 양극화가 발생한다. 리터러시 교육에는 시간과 돈이 드는데, 이게 가능한 엘리트 계층과 다른 계층 사이의 간극은 벌어진다. 함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상대방의 말은 이해 불가능한 ‘소음’으로 전락한다.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지는 문제다.

저자들은 리터러시를 서로 이해하기 위한 공통의 사회적 역량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이를 넘나들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고자 이 역량이 필요하지, 줄 세우고 갈라져 살고자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편 가르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세계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의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어렵다. 내전에 준하듯 갈라져 싸우는 모습이 익숙해진 오늘날, 공동체니 교통이니 하는 말은 좀 한가해 보인다. 하지만 결국 올바른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공도서관의 활성화나, 일상적인 독서 토론과 같은 수단들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불가능하거나 무기력한 대안은 아니다.

다매체 시대의 리터러시 교육은, 매체가 가져다주는 가능성과 한계를 파악하고, 가능한 한 수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떤 매체가 우월한지 따지는 것이 더욱 한가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가치가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찾아갈지를 고민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결론이다.

변화의 시대, 방송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 영상을 다루지만, 개인들의 선호를 완전히 만족시키기엔 너무 거대하다. 역으로 이 특징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때 책을 집어 삼켰다는 비난을 뒤집어 쓴 ‘바보상자’가, 이제는 교육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시대의 변화 아니겠는가. 

만족스럽진 않아도 SBS <정치를 한다면>과 같은 프로그램은 리터러시 ‘교육’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이 프로그램은 정치에 뛰어들어도 보고, 정치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녀도 보면서 정치인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든다. 순결함과 부패함 사이를 진동하며 혐오를 키우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를 높이는 것, 이것이 대중 매체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효용이 아닐까. 우리에겐 아직 ‘체험’과 ‘역지사지’의 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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