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논스톱' 덕분에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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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논스톱' 덕분에 배운 것
[내 인생의 프로그램 ⑥]
  • 김민식 MBC PD
  • 승인 2020.08.21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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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한 ‘PD 글쓰기 캠프’가 지난 7월 8일부터 11일까지 파주 출판단지 지지향에서 진행됐다. 자기 성찰과 프로그램 질적 향상을 위해 기획된 글쓰기 캠프에 참여한 PD들이 ‘내 인생의 프로그램’을 주제로 쓴 글을 차례로 싣는다. <편집자 주>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방송된 MBC '뉴 논스톱' VOD 갈무리.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방송된 MBC '뉴 논스톱' VOD 갈무리.

[PD저널=김민식 MBC PD] 2002년 나의 연출 데뷔작 MBC 청춘 시트콤 <뉴 논스톱>이 스위스 골든 로즈 국제 페스티벌 본선에 올랐다. 본상 수상의 부푼 꿈을 안고 스위스 몽트뢰로 날아갔다. 아시아 시트콤 역사상 최초의 본선 진출이라는 말에 쾌재를 외치던 나는 현지에 가서 비로소 깨달았다. 아시아 방송 산업이 낙후해 지역 예선 출품작도 드물던 시절, <뉴 논스톱>의 본선 진출은 국제 대회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배려였을 뿐, 수상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을. 그래도 국제 대회 초대를 받은 게 어디냐, 신이 나서 대회장을 활보하다 영국 BBC 프로듀서를 만났다. 그는 당시 보기 드문 아시아인 방송제작자를 신기해하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무슨 일을 하니?” 
“나는 일일 시트콤 연출이야. (I am a daily sitcom director.)”
“일일 시트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응, 월화수목금 일주일 내내 방송하는 시트콤이야.” 
“매 에피소드 마다 다른 연출이 붙는 거니?” 
“아니? PD는 나 혼자야.” 
“아, 그렇게 4주간 방송해서 20회를 만들면 끝나는 구나?” 
“아니, 그냥 계속 만드는데? 지난 2년 동안 나는 30분짜리 방송 400편을 만들었어.”  

영국 프로듀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외국의 시트콤은 주1회 방송하거나, 영국의 경우 1시즌에 8편을 제작하는데, 그나마 에피소드마다 연출이 바뀐다. 눈이 똥그래진 그가 물었다. 

“넌 정말 빨리 찍는가 보구나. 비결이 뭐니?” 
“난 포기가 빨라.”

일일 시트콤을 연출하려면 포기가 빨라야 한다. 장소가 마음에 안 들어서, 대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날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촬영을 접어야 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지만, 그래도 오늘 중으로 촬영을 끝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안 그러면 다음 주 방송 펑크다. <뉴 논스톱> 시간에 갑자기 <톰과 제리> 특별편성이 나갈 수 있다.

영어권 방송사처럼 해외 판권 시장만 크다면, 나도 일주일에 한 편 만듦새에 공을 들여 명품을 만들고 싶다. 내수 시장 규모는 5천만 명 정도인데, 한국어를 쓰는 유일한 외국은 수출이 안 된다. 즉 북한에서는 심지어 한국 방송을 보다가 잡혀갈 수도 있다. 내수 시장의 한계로 인해 한정된 제작비로 광고 판매를 극대화하자니, 남들 한 편 만들 시간에 다섯 편씩 찍어내야 한다. 빨리 찍자니, 카메라 세 대 동시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에서 녹화할 수밖에 없다. 세트에서는 그림에 힘을 줄 수 없으니, 망가지는 코믹 연기와 극단적인 러브 라인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수밖에 없다.

재주 많은 드라마 작가는 주인공에게 처음에는 시련을 안겨주고 나중에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순간을 준다. 한국 드라마 산업이 걸어온 길도 비슷하다. “막장인데다 뻔한 이야기”라는 비난과 냉소를 딛고 조금씩 국민의 사랑을 얻으며 성장한 결과 ‘한류 열풍’이라는 성공을 일구어냈다. 열악한 방송 환경과 시장 상황에서 한국 드라마가 성공해 온 과정은 시청자가 그토록 원하는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뉴 논스톱>이 내게 준 선물이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포기가 빠르다. 출판사와 계약을 한 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를 쓰겠다고 천년만년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붙잡고 있지는 않는다. 일단 빠르게 초고를 쓰고, 시간이 날 때마다 고치고 다듬는다. 매년 한 권씩 책을 내지만 출판사와 약속한 원고 마감에 늦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느 출판 편집자가 내게 물었다. 

“어쩜 PD님은 그렇게 마감을 따박따박 잘 지키세요?”
“마감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포기하는 습관을 길렀고, 그 덕분에 마감 약속을 잘 지키는 저자가 됐다. 편집자가 원고를 읽고 마음에 들지 안 들지는 알 수 없다. 그건 편집자 고유의 영역이다. 마감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그건 작가의 영역이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마감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나는 빠르게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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