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멍', 치유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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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멍', 치유의 시간
[뽕짝이 내게로 온 날 51]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 승인 2022.04.18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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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지난겨울, 다른 방송사의 피디들과 진안 여행을 다녀왔다. C 방송사의 M 피디가 주선해서 K 사의 S 피디, J 사의 H 피디 등이 오후 늦게 전주를 출발해서 1박 2일의 여정을 함께 했다. H는 ‘불멍’에 꽂혀있었고 S가 동조해서 나도 매우 기대되었다.

H는 제대로 캠핑 기분 내보자며 고구마를 준비했다는 둥, 벙거지 네 개를 주문했다는 둥, 장작을 주문했다는 둥, 며칠 사이 흥미를 유발하는 메시지로 고무해왔고 참가자들이 각종 간식이며 즐길 거리 정보를 업데이트하면서 흥미가 더해졌다. 역시 여행은 준비하는 과정이 즐겁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던 차에 후배들이 먼저 챙겨줘서 적잖이 감동이었다.

마침 숙소에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해서 ‘불멍’에 동참하게 됐다. 우리 일행 중 캠핑에 익숙한 사람이 없어서 불도 피우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진안군에서 일하는 H 피디의 후배가 자원봉사를 자청하여 불을 피우고 거들었다. 그 후배가 애써준 덕분에 비로소 불이 활활 타올랐다. 주변이 밝아지고 따뜻해졌다. H는 신문지와 알루미늄 포일로 ‘소중하게’ 감싼 고구마를 굽기 시작했다. 아, 얼마 만에 보는 모닥불인가. 나도 불 앞에서 기분이 좋아졌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 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없어라
(박인희 노래 / 모닥불 가사)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불러왔던 ‘모닥불’ 노래가 짧은 노랫말 속에 인생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곱씹을수록 명언이고 부를수록 명곡이다. 

장작이 타닥 타닥 소리를 낸다. 불도 말을 하는구나. 불티가 하늘로 오르다가 사그라든다. 추운 겨울에 똑같은 벙거지를 쓰고 불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마음이 평화롭다. ‘불 멍’의 미덕은 다름 아닌 명상의 위력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눈발도 흩날리는데 H랑 S는 불놀이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널따란 장작을 밀어 넣으면서 ‘이것만 태우고 가자’고 말했지만 서너 번 번복되도록 일어날 기미가 없다. 새 장작을 불 위에 쌓아놓고 잠시 뒤 불길이 치솟았다. 그 장면도 장관이다. 일정한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벌떡 일어서 “와!”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내마음의 창을 열고
두팔을 벌려서 돌면 
야 불이 춤춘다 불놀이야
꼬마 불꽃송이 꼬리를 물고
동그라미 그려 너의 꿈을 띄워봐
(옥슨 80 노래 / 불놀이야 가사 일부)

옛날 어른들은 “불장난하면 자면서 오줌 싼다”라고 경고하셨는데 아마도 불놀이하다가 큰 변을 당할까 봐 우려의 말씀인 듯하다. 불놀이가 제법 재미있다. 장작도 크기에 관계없이 제 몫의 사명을 다 한다. 작은 나뭇가지나 검불은 불을 붙이는데 쓰이고 몸통이 큰 것은 제 몸을 크게 태워 크게 불을 일으킨다. 장작의 일생이 별거 없다 할지라도 불씨를 남기니 그 공덕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이젠 사랑의 불꽃 태울 수 없네
슬픈 내사랑 바람에 흩날리더니
뜨거운 눈물 속으로 사라져버렸네
텅빈 내 가슴에 재만 남았네
불씨야 불씨야 다시 피어라
(신형원 노래 / 불씨 가사 일부)

불씨는 계속 불을 지피고 그렇게 밤이 깊어간다. 얼마나 오랫동안 '불멍'이 이어졌는지, H가 애지중지 집에서부터 신문지로 몇 겹 감싸고 알루미늄 포일로 싸매어 정성 들여 구운 고구마는 끝내 숯이 되고 말았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장렬히 산화한 고구마의 흔적을 더듬으며 겨우내 저장했던 웃음보가 터졌다.

웃음소리에 화답하듯 불길이 또 한 번 크게 흔들거리며 치솟았다. 손뼉 치며 깔깔거리는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불멍’과 고구마가 남긴 웃음의 콜라보를 끝으로 대장정의 불놀이가 마무리되었다. H 피디의 후배가 불씨를 단속하고 꼼꼼하게 불단속을 하여 안심이었다. 

언제부턴지 내 가슴 속엔 꽃씨 하나 심어졌었지
가을 지나듯 봄이 오더니 어느 틈에 싹이 돋았지
바람불어 잠못자던 날 왠일인지 가슴뛰던 날
아 아 꽃은 피었지 뛰는 가슴에 불꽃처럼 피었지
사랑의 꽃 행복의 꽃 생명의 꽃 영혼의 꽃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송이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송이
(정미조 노래 / 불꽃 가사)

캠핑장에서 캠프파이어는 새벽녘에 끝났지만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내 가슴속에 불씨 하나가 살아 있었나 보다. 무념한 가운데 꿈틀거리고 무기력할 때 파닥거린다. 무료함 속에 뜨겁게 불티가 튀어 오른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정신이 번쩍 든다. ‘불 멍’은 침잠이 아니라 치유이고 거듭남의 기연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시들해진 심신을 인공호흡으로 살려내 봄기운을 흠뻑 받을 수 있도록 ‘거듭남의 불멍’에 초대해준 인연들에게 감사하다. 그날 간직한 불씨로 새 봄, 희망의 불을 지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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