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잘 크는 아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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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학습자 대상으로 한 뉴질랜드 ‘리딩 리커버리’ 제도
빠른 성장 보여준 준이,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면 어땠을까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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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김지원 EBS PD] 준이를 만난 건 뉴질랜드에서였다. 당시 준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아시안이 많지 않은 학교에서 몇 되지 않는 한국계 뉴질랜드인이었다. 또래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크고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쉬지 않고 떠드는 밝고 쾌활한 아이였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작문이었는데, 초6인데도 과제로 A4 3~4장 정도 길이의 글도 써내곤 했다. 직전 학기에는 작문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준이의 부모는 한국인이지만 부모님 모두 영어를 능숙하게 했고, 더욱이 준이 본인은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뉴질랜드 토박이니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잘하는 게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더욱이 발음은 좀 어눌하지만 한국어도 일상 대화는 가능한 수준이라 이중언어가 가능했다.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 유치원 단계에서부터 영어 유치원 등 자녀의 영어 교육과 이중언어 사용에 대해 노력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준이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 했다. 특히 또래보다 월등한 실력의 에세이는 양으로도, 내용으로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준이 본인이 ‘나는 작문을 잘하는 아이야’ 라고 생각하며 글 쓰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신감을 보인다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반전은 준이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특별 선생님을 만나고 일어났다. 특별 선생님은 준이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티타임을 가지는 분으로, 준이가 초등학교 2학년(한국 기준 초1) 때 준이의 ‘리딩 리커버리’ 선생님이었다. '리딩 리커버리'는 뉴질랜드의 80% 이상의 초등학교에서 시행 중으로,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시점에 또래보다 모국어의 발달이 늦은 아이들에게 특별 수업을 제공하는 제도다.

준이는 초등학교 입학 시 읽기, 쓰기를 전혀 하지 못했고 초등 1년 동안 친구들에 비해 영어 실력이 빠르게 성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2학년이 될 시점에는 학교에서 가장 국어(영어)를 못하는 축에 들어 ‘리딩 리커버리’ 수업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었다.

1976년 발달 심리학자인 마리 클레이가 고안한 ‘리딩 리커버리’는 1983년 뉴질랜드의 국가 정책이 되어 현재까지 시행 중인 제도로 뉴질랜드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리 클레이가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된 것은 뉴질랜드의 독특한 인구 구성 때문인데 이민자가 많고 특히 이주가 잦은 퍼시픽 원주민의 특성상 학교에 잘 나오지 못해 같은 학년이라도 아이들 사이에 격차가 아주 크다는 것이 프로그램 개발의 계기였다. ‘리딩 리커버리’ 수업은 현실에 존재하는 격차로 인해 탄생했고,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뉴질랜드 교육 정책의 의지이자 근간이 되고 있다. 

수업은 체계적인 과정으로 설계되어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한국 기준 0학년-유치원 단계)에 입학하면, 1년 동안 각 담임과 리딩 리커버리 전문교사가 전 학생의 언어 발달을 주기적으로 관찰하고, 2학년으로 올라가는 시점에 또래보다 모국어의 발달이 뒤처진 아이들을 리딩 리커버리 수업 대상자로 선정한다.

‘리딩 리커버리’ 수업은 대상 아이들을 또래의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려 추가 도움 없이도 교실에서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이들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1:1로 특별 수업을 받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 기간 동안 부진 단계에서 평균(혹은 평균 이상)의 단계로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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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리딩 리커버리 수업을 받고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초등학교 6학년인 지금도 주기적으로 리딩 리커버리 선생님을 만난다. 리딩 리커버리가 끝나도 담당 교사들은 아이가 이후 교실 수업에서 정말 어려움을 겪지 않는지, 수업을 받는 것에 문제가 없는지를 최소 3년 동안 추적 관찰하기 때문이다.

실제 준이의 성적표를 보니 초2까지 전국 평균(내셔널 평균) 이하라고 기재되어 있었지만,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전국 평균 수준, 5학년 2학기부터는 일부 과목이 평균 이상, 6학년은 거의 전 과목이 평균 이상 수준이었다. 준이는 리딩 리커버리 수업의 목표대로 또래 친구들의 수준만큼 올라왔고, 그 이후에는 또래보다 더 빠르게 성장 중이었다. 

아이들은 같은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 기질과 처한 환경에 따라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도 있다.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이 지능이나 배움에 대한 의지, 열정이 부족한 것이 아니기에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에게 그 속도에 맞는 도움과 지원이 있다면 아이들은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준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준이 부모님은 정말 많이 걱정이 되었을 거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이 학원 저 학원 뛰어다니며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개인적으로 애를 썼을 거라고 하셨다. 그 과정에서 아이도 마음을 다치고 본인들도 상처를 받았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혼자서, 알아서 잘 크는 아이는 없다. 알아서 잘 크는 아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한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부모와 가족,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학교, 사회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 두냐에 따라 더 많은 아이들이 별일 없이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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