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줄어드는 시대의 어휘량...'심심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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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하이킥' 레전드 '회자정리' 편을 지금 방송한다면
개인 선택이더라도 ‘어휘를 몰라도 된다’는 사회 분위기는 문제

코로나19 재유행 속 서울 대부분 초·중·고등학교가 개학한 8월 25일 오전,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코로나19 재유행 속 서울 대부분 초·중·고등학교가 개학한 지난 8월 25일 오전,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PD저널=김지원 EBS PD] 2006년 방송한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고등학생 윤호는 갑자기 여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 여자친구가 헤어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회자정리’. 무슨 뜻인지 몰랐던 윤호는 집에 와서 ‘해자적리’, ‘혜자정리’ 등 다양한 단어를 검색해보지만 결국 ‘회자정리’를 알아내지 못한다. 전교 꼴찌 수준의 무식한 캐릭터라는 점을 살려, 윤호가 이별의 순간에서도 결별의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이 에피소드는 큰 웃음 소재가 되어 지금까지 레전드 편으로 불리고 있다. 

이 에피소드가 지금 방송을 한다면 어떨까? 현재 중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자성어다. 2021년 EBS <당신의 문해력> 제작진이 중학교 3학년 학생 2,000여 명을 대상으로 독해력 시험을 본 결과, 사자성어 문제는 가장 많이 틀린 문제 중 하나로 꼽혔다. 사자성어의 뜻만 알았다면 풀기 쉬운 문제였음에도 사자성어의 의미를 몰라 틀린 학생들이 많았다.

비단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20대는 현재 성인을 위한 국어학원을 다니고 있다. 계기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문이었다. 드라마에서 ‘권모술수’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되었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해당 단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휘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이제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2019년 조양호 전 회장의 사망 소식에 ‘숙환’이라는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로 떴고, 2020년에는 광복절 연휴 소식에 ‘사흘’이 하루 종일 실시간 검색어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최근에는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甚深)한’이 화제였다. 모르는 데에는 기준이 없었다. 한자어라서 어렵고, 순우리말이라서 어렵기도 했다. 그저 모두 ‘낯설’ 뿐이다. 

놀라운 것은 심심치않게 포착되는 ‘몰라도 된다’, ‘어려운 단어를 쓰는 사람이 잘못이다’라는 분위기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윤호가 슬픈 이별의 상황에서도 ‘회자정리’를 몰라서 큰 웃음을 주었다면, 지금은 “그 여자는 왜 쓸데없이 저렇게 어려운 말을 써? 누가 저런 단어를 쓴다고?!”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은 개인의 선택일 수 있다. 단어를 잘 모른다고 개인이 안게 될 책임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므로, 그 또한 선택이자 취향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몰라도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되면 그건 사회의 문제가 된다. 어휘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오는 9월 1일 방송되는 EBS '당신의 문해력 플러스-어른을 위한 어휘력’ 편. ©EBS
오는 9월 1일 방송되는 EBS '당신의 문해력 플러스-어른을 위한 어휘력’ 편. ©EBS

성인의 어휘력은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부모가 1일 평균 단어를 적게 말할수록 아이 또한 적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특히 3세 아동이 사용하는 단어의 86~98%는 부모가 사용하는 단어로 이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현재 부모 세대인 30~40대 성인들의 어휘력이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이유는 지금 세대의 어휘력이 다음 세대의 어휘력과 문해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회적 생물이라,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매년 수 백 개씩 신어가 생기고, 이미 사라진 지역어도 수두룩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탄생과 소멸을 막을 길은 없지만, 필요하다면 소멸을 지연시키는 노력이 중요할 수도 있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단어가 사라지면 그 단어를 둘러싼 감정과 상태, 세계마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번 줄어든 한 개인의 어휘량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실제로 ‘사흘’, ‘심심한’이 화제가 된 또 다른 이유는 급격하게, 빠른 속도로, 한 시대의 어휘량이 줄어들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한 진지하고 심심한 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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