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필요한 건 말싸움 TV토론이 아니라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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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56] '철학책 독서 모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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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함께 읽기’란 꽤 귀한 경험이다. 성공 조건을 달성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야 하고, 비슷한 책을 좋아해야 한다. 동시에 읽어야 하는데다 다른 사람에게 읽은 바를 설명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난한 과정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수도 적은데다, 책모임이 만들어진다 해도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이 경험은 귀하고 특별하게 즐겁기에,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꾸준히 모임을 시도하게 된다.

박동수의 <철학책 독서 모임>은 낮은 확률(!)을 뚫어 낸 ‘함께 읽기’의 결과물이다. 출판사 편집자들이 함께 모여 철학책을 읽고, 그 책을 통해 오늘날 긴급한 과제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도출하고, 그 과정에서 각자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그 차이와 공통점을 비교해 본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게다가 책으로 만들어져 나왔기에, 이 확장의 경험을 독자들도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자기가 맡은 책을 내기도 바쁜 사람들이 굳이 철학책을, 함께, 읽는 번거로운 작업에 뛰어든 걸까? 저자는 답한다. 철학은 “영원한 지혜나 위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사유하게 하는 통로이자 세상의 실상과 마주해 전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철학책을 함께 읽으며 마주하는 답답함과 대화의 단절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개념들이나 전제를 의심하게 만든다. “기존의 이해를 중단시키고 타자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이해와 개념 자체를 재점검”하는 경험은 ‘함께 읽기’ 아래에서만 발생한다. 

대화를 이어 나가기보다 어둑한 ‘전짓불’ 앞에서 어느 편인지 더듬거리며 확인하는 데 급급한 오늘날, 이 책 그리고 독서 모임은 세계에 대한 진지한 대답의 방식이다. 대답을 내놓기 위해 저자가 탐독한 책은 총 열 권이다.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한 것이 철학”(헤겔)이기에 모두 출간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책들이며 각자의 영역에서 오늘날의 이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박동수 편집자가 집필한 '철학책 독서모임'
박동수 편집자가 집필한 '철학책 독서모임'

저자는 이 책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세 개의 장으로 나누고, 각 장마다 간략하게 책을 요약한 후 말미에 독서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서로 어긋나는 독해들을 덧붙였다. 마치 독자들도 자신의 읽기를 덧대어 보라고 말하듯이. 

첫번째 장에서 저자는 오늘날의 사회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다원화된 사회이며,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하고 소중히 대하라는 윤리적 호소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문제 의식을 도출해 낸다. 우리는 ‘기분 좋은’ 공존이 일종의 환상임을 인정하고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불가능한 환대의 명령과, (실존하지 않았던) 동질적인 과거라는 환상 사이에 놓인 좁은 연대의 가능성을 이졸데 카림, 아즈마 히로키, 리처드 로티를 경유하며 탐색한다.

두번째 장에서는 이사야 벌린과 김현경의 책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바탕으로, 환대와 배제, 허무와 의미,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처럼 어느 한쪽을 쉽사리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놓인 우리가 섣부르게 한편을 선택하지 않기를 요청한다. 저자가 보기에 오늘날의 사회는 급하게 ‘편’을 가르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정답은 없고 때로 가치는 모순된다. 마녀 사냥을 할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일단 말을 마주 대어보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때로는 대화조차 불가능해 가르침의 형태로 말을 이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공통의 토대를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고립된 상태의 인간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한꺼번에 사유할 수 있는 확장된 시선들을 탐구한다. 팬데믹과 기후위기는 우리 앞에 놓인 생태적 위기가 무척이나 긴급함을 알려주는 동시에 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갈가리 찢어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함께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연대의 기초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독서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내놓은 나름의 대답들은 또다른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의 문제 의식은 독서 모임이라는 구체적인 활동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철학책을 함께 읽으며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타인과 조우하면서 자신이 익숙하게 여기던 것들을 의심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생각의 한계를 점차 확장해 나가는 과정은 함께 읽은 책들이 다루는 ‘연대’와 닮았다. 함께 기댈 공통의 토대가 없기에 연대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이 사소하지만 끈질긴 조우는 약간의 기대를 품게 만든다. 모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과, 만나지 않았을 생각을 읽어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책 말미에 길게 언급된 다양한 독서 모임과 토론 모임은 이 책이 한 사람의 지적 탐구의 결과물을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대화 사이에서 빚어진 결실임을 알려준다. 오늘날 이런 대화들은 더욱 많이 필요하다. 사실상의 ‘내전’ 상태인 오늘날 필요한 것은 편가르기를 가속할 말싸움 쇼로서의 TV 토론이 아니라, 당면 과제들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함께 읽기’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로제 샤르티에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라디오에서 진행한 대담처럼 고차원적인 수준은 아닐지라도, 느긋한 대화가 절실하다. 오늘날 방송이 제공할 최후의 교양은 아마도 이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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