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없는 '정상회담' 비판 보도 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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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간 얼굴을 보는’ 약식회담으로 끝난 한일 정상 간 만남
정부와 언론 모두 강제 징용 피해자 등한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22일(현지시간) 뉴욕 쉐라톤 뉴욕 타임스 스퀘어 호텔에서 한일 약식, 한독 정상, 바이든 주최 리셉션, 블룸버그 초청 만찬 관련 일정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뉴시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22일(현지시간) 뉴욕 쉐라톤 뉴욕 타임스 스퀘어 호텔에서 한일 약식, 한독 정상, 바이든 주최 리셉션, 블룸버그 초청 만찬 관련 일정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뉴시스

[PD저널=이봉우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객원연구원] 언론을 향한 불신이 심화되는 대표적 원인으로 보도의 정파성과 질적 하락이 꼽힌다. 심각한 얘기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간혹 돌출되는 기자들의 ‘오탈자’로 이용자들의 불신이 폭발적으로 가시화되곤 한다. 최근 ‘사흘’을 ‘4흘’로 쓴 기사, ‘이틀’을 ‘2틀’로 쓴 기사들이 쏟아져 세간을 당황케 한 바 있다. 그나마 이런 사례는 웃고 넘어갈 해프닝에 가깝다.  

언론 불신을 야기한 근본적 요소는 언론의 고질적인 ‘전문용어’ 남발이다. 독자나 기자 모두 친근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의미가 모호한 전문용어가 넘쳐난다. 겉으로는 오탈자가 아니지만 속이 비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4흘’처럼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국익이나 인권이 달린 중대 현안의 본질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18일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국장 참석 차 출국했는데 이때 쏟아진 ‘조문외교’ 보도가 대표적이다. ‘조문외교’는 대체 무엇인가? KBS <윤 대통령, 장례식 참석 ‘조문외교’…‘홀대’ 논란도>는 “장례식을 계기로 각국 정상급 인사들을 만나는 '조문 외교'”, “바이든 미 대통령, 트러스 영국 총리 등과 환담을 나눴고, 나루히토 일왕과도 인사”, “자유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국가들의 연대, 이른바 '가치 동맹' 추진 외교”라고 썼다. 이외 대부분의 보도들이 “500여 명의 주요국 정상, 고위인사들이 참석하는 지구상 최대의 외교의 장”이라 강조했다.

많은 고위급 인사가 모여 인사를 나누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외교’가 추진되는 걸까? 영국 여왕의 장례식에서 사람들과 인사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우리 대통령을 상상해보면 오히려 끔찍할 따름이다. 그나마 <대통령들의 남다른 조문… 단기간에 펼쳐지는 사상 최대 물밑외교전>(아시아경제, 9월 19일)의 경우 ‘2000년 6월 오부치 전 총리 장례식에 참석해 클린턴 미 대통령, 모시 요시로 일본 총리와 3국 정상회담 기반 확보한 김대중 전 대통령’ 등 과거 사례로 이해를 돕긴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이번 영국 방문에서 정부가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정상회담’의 상대와 목표, 중점 현안은 무엇인가? 

22일 TV조선 뉴스퍼레이드 리포트 갈무리.
22일 TV조선 뉴스퍼레이드 리포트 갈무리.

현재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추진하는 정상회담의 상대는 단연 일본이다. 9월 15일엔 ‘20일 뉴욕 유엔총회에서 한일정상회담 개최를 양국이 흔쾌히 합의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언론에게 일상적 용어에 가까운 ‘정상회담’은 과연 뭘까? 정확한 의미와 내용을 채운 기사는 찾기 어렵다. 양국 정상이 만나 무엇을 합의하며 그 합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유의미한 ‘합의’는 뭘까? 의례적 인사치레만 하는 건 아닐까?

지난 17일 연합뉴스의 <유엔 계기 한미·한일정상회담 개최…"한일, 흔쾌히 합의"> 보도에 따르면 한일정상회담은 “30분 남짓 얼굴 마주보는 회담”이고 익명의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강제징용 등 현안은 한국이 자체적으로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일본과도 내밀하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어 정상이 체크할 필요 없다”고 한다.

‘정상회담’ 관련 기사를 이런 식으로 쓰는 언론의 습관은 스스로와 독자 모두를 사실상 속이고 있다. ‘30분 남짓 얼굴 보는 회담’에서 대체 어떤 유의미한 대화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으며, ‘강제징용’이라는 국민의 인권과 국익이 달린 현안을 ‘체크할 필요도 없는’ 회담은 과연 정상적인 ‘정상회담’인가? 심지어 ‘흔쾌히 합의했다’던 정상회담을 일본은 유엔총회에 양국 정상이 모두 참석한 21일까지 부인했고 22일 윤 대통령이 직접 기시다 총리를 찾아가 기다린 끝에 정말로 ‘30분 간 얼굴을 보는’ 약식회담으로 끝났다. 언론은 이쯤되면 나올 법한 ‘굴종 외교’와 같은 비판을 이상할 정도로 아끼고 있다. 

‘한일정상회담’과 관련한 최근 정부의 태도와 언론 보도 양상은 모두 강제징용 피해자를 등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미쓰비시 등 일본 전범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 판결을 사실상 무효화하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법원에 의견서까지 보내면서 일본이 원하는 ‘프로세스’를 ‘자체적으로’ 진행 중인 한국 정부가 ‘한일정상회담 흔쾌히 합의’를 외치자 언론은 이걸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받아쓴다.

‘해법은 대위변제’라는 보도도 한일정상회담과 무관하게 꾸준히 흘러나온다(중앙일보 <강제징용 해법 돌고돌아…한·일 기업이 낸 돈으로 배상 가닥>9.7). ‘대위변제’ ‘자체 프로세스’ ‘정상회담’ ‘조문외교’와 같은 단어들 속에서 정작 ‘전쟁범죄 가해국의 범죄사실 인정과 사죄, 반성 없이 일단 피해자들에게 우리가 대신 돈부터 주고 한일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너무 단순해서 해괴한 현실은 흐려진다.

보도를 통해 보이는 정부의 태도는 텅 빈 ‘정상회담’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와 같다. 언론이 ‘정상회담’이나 ‘조문외교’와 같은 상징적 단어들을 있는 현실 그대로 풀어 쓰고 질문을 해야 정부도 성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언론과 정부의 건강한 관계가 형성된다면 ‘4흘’을 쓰는 언론도 이용자들이 웃고 넘어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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