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를 위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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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PD저널=박재철 CBS PD] 지역명이 세계사의 한 장면을 표상하는 경우가 있다. 아비뇽은 유수로, 카노사는 굴욕으로 중세사의 굴곡진 한 마디가 설명된다. 인물명에도 서술어가 태그처럼 붙어 사건 이해의 열쇳말 구실을 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서희가 그 예다. 서희 하면 ‘담판’이다. 고려시대, 불리한 형국에서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대면해  당당하고 조리 있는 변론으로 대군을 돌리게 하고 강동 6주마저 얻은 우리 외교사의 쾌거가 바로 ‘서희의 담판’이다. 

얼마 전 프로그램에 초대한 정내권 전 기후변화 대사의 인터뷰는 잊고 있던 서희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UN에서 환경 관련 막후 외교 협상 이야기를 담은 그의 신간 타이틀도 공교롭게 <기후 담판>이다. 

예나 지금이나 ‘담판’은 마지막 뒤집기나 역전극 같은 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불리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판세가 급격히 바뀌는 능동태의 뉘앙스를 이 단어는 품고 있다. 이치에 닿는 논리와 허를 찌르는 순발력, 그리고 전체 판을 보면서 “적은 최소화하고 동지는 최대화”하는 다자외교 전술이 전제돼야 가능한 게 ‘담판’이다.

정내권 대사는 30년 넘게 환경 분야의 외교관으로 일했다. 세계 기후 환경과 관련해 우리의 위상이나 저변의 관심도에 비춰 볼 때 2007년 노벨평화상 개인 사본을 수령 했다는 사실은 그의 이력이 단순히 시간 축적만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녹색성장’이란 조어를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시킨 것도, 선진국의 환경기술을 후진국에 이전하도록 한 ‘공공소유기술 이전 제도’도, 법적 강제력 없이 개도국의 탄소 감축을 유도한 ‘자발적 온실가스 감축 국제 등록부’를 제안, 신설한 것도 온전히 그의 업적이다. 

무엇보다 외교관으로서의 그는 담판에 능한 달변가다. 방송에서 풀어내는 강대국과의 막후 협상 이야기는 듣는 재미만으로도 몰입도를 높였다. 
 
“환경 산업 관련해서 특허권은 선진국에 있어요. 몇몇 다국적 기업들한테. 지금 대한민국은 할 수 없이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 가스를 쓸 수밖에 없어요. 선진국에서 기술을 못 쓰게 하니까. 환경 관련 특허를 푸는 강제조항이 있어야 자발적 규제가 가능하다고 UN에서 발언을 했죠. 예상대로 난리가 났습니다. 1 대 20으로 앉아서 한 8시간을 싸웠어요. 끝까지 버텨서 결국 ‘Compulsory Licensing(강제 실시권)'를 넣었죠. 그 단어가 공식 문서에 지금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제 자랑이냐? 아닙니다. 최근에, 최빈국에 대해 코로나 19 백신 강제실시 얘기가 나왔죠? 그런 것들이 사실 이 조항을 원용할 수 있는 겁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외교공식 문서의 문구 하나하나에 왜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단박에 실감케하는 에피소드다. 공공의 목적이 분명할 때 특허를 일시적, 예외적으로 푸는 논란에 대해 이 공식 문서의 자구 하나가 어떤 지렛대 역할을 했으리라 추측을 해본다. 정 대사의 또 다른 사례가 이어진다. 

“온실가스 감축 의무와 관련해서 강대국의 압박이 컸어요. 우리가 OECD 국가인 만큼 선진국 의무를 지라는 거죠.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200년 동안 산업화를 한 사람들하고 70년대 시작해서 이제 겨우 좀 살만한 나라하고 똑같은 의무를 진다는 게 뭔가 좀 부당하다 싶었죠. 이런저런 이유로 미뤘는데 일본이 공식 석상에서 
우리나라를 콕 지명을 해 공격을 했어요. 명백한 외교적 결례죠. 바로 제가 반박을 했어요. 옛 성현의 말씀에 ’자기들이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라고 했는데, 일본 대표는 온실가스 감축 관련해 자기 목표치는 발표하지 않으면서 남의 나라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우리는 현재, 일본이 어떻게 하는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일본이 모범적으로 잘하면 우리가 그걸 보고 참조해서 하겠다. 우리 걱정하지 말고 당신들부터 과감한 감축 목표치를 설정하라고 말이죠.”

지난 8일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한 정내권 전 기후대사.
지난 8일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한 정내권 전 기후변화 대사.

일상생활에서도 곧바로 적절한 대응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뒤늦게 자책과 후회를 한다. 공식 외교 석상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평소 유사한 사례를 통해 대응 논리를 준비해놓지 않으면 눈뜨고 코베일 상황이 비일비재하지 싶다. 임기응변을 넘어선 세련된 외교적 대응력 역시 펼치긴 어려울 것이다. 정 대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이든 국가든, 말과 논리는 남을 찌르는 창이라기보다는 자기를 보호하는 방패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인터뷰 말미에 이르자, 꼭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준비된 이야기를 꺼냈다. 요는 기후문제의 실천은 결국 돈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불 주체는 우리가 생각하듯 기업이나 국가가 아니란다. 

“그린피스든 어디든 정부를 야단치고 기업을 야단치는 환경운동은 있지만, 나부터 돈을 내겠다는 환경운동은 없어요. 나부터 돈을 내겠다는 사회운동을 해야 세상이 바뀝니다. 저는 요즘 ’자발적 탄소가격 지불운동’을 하자,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도 KTX 티켓 팔 때 정규가격, 기후변화 가격 이렇게 차별화하면 어떨까요. 전기 가격도 그냥 전기 가격과 기후변화 가격으로 하는 거죠. 더 낼 사람은 더 내고 그 돈 모아서 재생에너지를 사고 그거야말로 소비를 줄이고 기후환경도 바꿀 수 있는 방법이죠. 아무도 비싼 가격으로 티켓을 안 살 것 같죠?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많이들 삽니다. 소비자가 안 바뀌면 환경도 안 바뀝니다.”

정 대사는 ‘정말 가능할까?’ 싶은 이야기들을 인터뷰 중에 과감히 꺼냈다. 자신의 말에 설득력을, 조소 뼈대에 찰흙을 붙이듯 하나둘씩 두텁게 붙여나가면서. 최근 4조 원이 넘는 자산을 환경단체에 기부한 파다고니아의 이본 쉬나드 회장은 지구세(Earth Tax)를 본인이 정하고 오랫동안 내왔다.

“Don’t buy this jacket”이란 광고문구를 내세웠지만 재킷은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발상의 전환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 지금의 기후환경 분야가 아닐까. 이본 쉬나드 회장처럼 정내권 대사의 시선 역시, 먼 곳에 던져져 있다. ‘오래된 미래’로 향하는 그의 이야기는 아인슈타인의 경고로 마무리됐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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