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프와 이데올로기', 어느 재일코리안 삶에 박힌 시대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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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개봉하는 다큐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연출한 양영희 감독, 다큐 3부작 완성
모친 4·3사건 이야기 듣고 영화화...한반도 긴장 고조 시점에 의미 깊어

10월 20일 개봉하는 양영희 감독의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제13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0월 20일 개봉하는 양영희 감독의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제13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PD저널=박진홍 SBS PD] 한 개인이 살아온 시대는 그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때로 그 흔적은 그저 흔적인 것을 넘어 삶 전체를 뒤흔들기도 하고 나아가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엄혹한 시대의 중심에 서본 사람은 그 시대가 남긴 흔적의 무게를 감당하고 살아야 하는 원치 않는 운명과 함께 집요하게 달려드는 하루하루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살게 된다.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에서 정치와 이념의 큰 서사를 받아내며 살아온 개인을 그린 양영희 감독이 세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는 시대가 개인에 남긴 흔적과 그가 지켜온 삶을 이야기한다.       

열여덟 살에 눈앞에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을 책임 있는 사람의 입으로 사과 받는 일은 칠십 년이나 지나서야 이뤄졌다.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는 정식 여권도 받지 못한 채 고향에 돌아왔고 노여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칠십 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그 무서운 바닷가에서, 햇살 가득한 고향의 들녘에서 어머니는 말을 잃었고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 졸았다.

슬픔은 터져 나오지 않고 종잇장에 먹물이 배듯 번져나간다. 아프다. 살육에 관한 어머니의 기억을 듣고 그 기억이 살아있는 무덤들과 죽어간 이름들을 확인하고서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고향을 등진 이유를 깨닫게 된 감독의 눈물은, 말과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 앞에서 갈 곳 잃고 떠돈다. 처연하다. 

역사가 기록한 이름은 제주 4·3사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살 길을 찾아가던 사람들이 백 명 천 명 만 명씩 무참히 죽어나갔다. 욕심과 미움은 미친 불길처럼 삶을 불태워 버렸고 내놓지 못하는 슬픔은 수십 년 동안 피처럼 고이고 고였다. 차별과 멸시를 감수하면서까지 고향을 떠나온 두 남녀는 타지에서 가정을 이뤘고 떠나온 땅의 북쪽에 마음을 심었다. 자식들을 떠나 보냈고 피땀으로 모은 돈을 보냈으며 닿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사랑을 보냈지만 그조차도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했다. 조국은 갈라져 있었고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10월 20일 개봉하는 양영희 감독의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스틸컷.
10월 20일 개봉하는 양영희 감독의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스틸컷.

닭의 배를 갈라 마늘과 대추와 인삼을 채우고 다시 촘촘히 꿰매 다섯 시간을 끓인다. 닭백숙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수프라고 부르는 진한 닭고기 국물을 어머니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던 일본인 사위를 처음 만나는 날 정성껏 준비한다.

조선적 어머니와 한국 국적 딸과 일본인 사위가 국물을 나눠 먹고 고기를 맛본다. 어머니는 마지막 기력을 짜내듯 끔찍한 학살의 기억을 딸 앞에서 말하고 사위를 맞이하고 닭백숙을 끓이고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칠십여 년 간직한 아픔을 담고 있기에는 육신의 기력이 쇠하고 있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는 버텨낼 수 없어서일까, 그러고 나서 조금씩 기억을 잃어간다. 

한반도에서 이주했거나 이주한 부모 조부모를 둔 재일교포, 이른바 재일코리안은 자신이 원치 않아도 개인의 삶 속에 민족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새기고 살아간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름과 출신을 부정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권리가 그들에게는 여전히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여야 할 조국이 여전히 두 개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 그들은 국적을, 정체성을, 어느 쪽인지 택할 것을 강요받으며 산다.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에서 재일코리안과 북송문제를 다룬 양영희 감독은 어머니에게서 4·3사건에 관한 고백을 들으면서 영화를 구상했고 결국 본의 아니게 다큐멘터리 삼부작을 완성하게 됐다고 전한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따뜻함과 처연함을 함께 품은 사랑스러운 영화다. <파친코>에 감동한 관객이라면 한 번 더 감동할 것이다. 남북한이 다시 포사격을 교환하고 철지난 전술핵 논쟁이 일고 있는 시점이라 더 의미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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