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뉴스는 왜 구어적 활력을 획득해야 하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경수의 방송인문학 ⑫]

<오징어게임>의 성공으로 한국 영상시장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콘텐츠 시장은 누가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킬러콘텐츠를 만드느냐에 따라 '빅 머니'가 결정되는 게임장이다. 독창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창의적인 콘텐츠를 분석하는 작업도 의미가 적지 않다. 방송 콘텐츠 전문가인 홍경수 아주대 교수가 2~3주에 한 번 꼴로 인문학적 관점으로 콘텐츠를 분석·비평한다. -편집자 주
지난 5일 MBC 뉴스데스크 '애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리포트 갈무리.
지난 5일 MBC 뉴스데스크 '애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리포트 갈무리.

[PD저널=홍경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태원에서 156명의 목숨이 희생된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터졌다. 국가와 사회와 어른이 또다시 젊은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고 말았다. 강의실에서 만난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어른으로서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삼풍백화점이, 성수대교가, 세월호가 목숨을 앗아갔을 때 다짐했던 결심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수치스럽기만 하다. 방송 뉴스를 보았다. 방송 뉴스를 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환경감시를 제대로 해서 앞으로 어떤 사고를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방송 뉴스를 보며 느낀 점은 대형 참사가 일어나 156명의 생명이 사라졌는데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검정색 옷에 ‘근조’ 없는 검은 리본을 단 KBS 앵커들은 리본을 달았는지 안 달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자율적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보도 자료까지 배포해 알렸다.

'당시 아직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중상자들도 많았던 상황에서, 사망자에 대한 애도의 뜻을 담고 있는, '근조(謹弔)' 글자가 없는 검은 리본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고,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이 더 깔끔해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는 보도 자료의 내용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자율성’을 지켰다는 변명으로는 고인과 유족 그리고 시청자들을 위로하고 함께 슬퍼하는 자세를 충분히 보이지 않은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검정색의 리본은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아서, 애도를 표하고 있는지 아닌지 시청자들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SBS 뉴스의 앵커 역시 ‘근조’없는 리본을 달고 진행했고, MBC는 31일까지 ‘근조’없는 리본을 달다가, 11월 1일부터 ‘근조’ 리본으로 바꿔 달게 되었는데, 보도국장은 “‘근조’라는 문구가 리본에 들어가지 않은 게 이상해 제작 경위를 파악했고 실무 직원을 통해 위와 같은 경위를 파악해, 통상적으로 달아오던 ‘근조 리본’을 패용하도록 다시 지시했다”고 밝혔다고 한다(미디어오늘). 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 볼 때, ‘근조’가 없는 리본과 ‘근조’ 리본은 달리 보였다. 마치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하거나(‘근조없음’), 슬픔을 이야기 하는 모습(‘근조’)같아서다. 사회적 참사와 앵커의 리본은 큰 은유로 읽혔다. 왜 뉴스는 유족과 시청자들의 슬픔을 함께 하지 못하고 감정을 막으려 한 것일까 계속 궁금하다. 

지난 10월 31일 앵커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앞에서 뉴스를 진행한 KBS '뉴스9' 화면 갈무리.
지난 10월 31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앞에서 앵커가 검은 리본을 달고 뉴스를 진행한 KBS '뉴스9' 화면 갈무리.

슬픔이 억눌린 뉴스에서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뉴스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 지나치리만큼 감정을 억누른 기자들이 담담하게 낮은 톤으로 뉴스를 ‘읽어나갔다’. 방송 뉴스는 신문 뉴스와 다르다. 영상이 있고 기자들이 말로 전하는 뉴스다. 하지만, 텔레비전 뉴스가 라디오 뉴스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웃던 선생님의 말씀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방송 뉴스는 현재적인 감각을 전달하며, 시청자에게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입말이지만, 한국의 방송 뉴스는 글로 쓴 기사를 읽어나가는 서사방식을 줄기차게 유지하고 있다.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고, 정리된 글을 읽어나가며, 문어적인 특성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사회적 파장이 큰 뉴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신중하게 기사를 쓰고 읽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어적 특성 때문에 방송 뉴스는 밋밋한 단순성을 유지하고 있다.  

10·29 참사를 보도하는 한국의 방송 뉴스들은 섬뜩하리만치 차분하게 진행됐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는데, 이토록 침착할 수 있을까? KBS <뉴스9>의 11월 4일 보도에서 참사와 관련된 기사는 총 12건, 그 중 단 1건에만 취재기자의 얼굴이 등장했다. 나머지는 모두 영상에 숨은 기자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기자의 감정을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MBC는 8건의 기사 중 2건으로 더 높은 비율로 취재기자가 등장했다. JTBC는 대부분의 뉴스에서 기자들의 등장은 없었지만, 앵커가 현장에서 진행하며 현장감을 전달했고, 클로징에서 의견을 강력하게 전했다. 시청자들은 기자들이 직접 등장하거나 앵커가 현장에서 진행할 때 활발한 정동을 감지하는데, 이러한 특성이 입말, 즉 구어적 특성과 좀 더 가깝기 때문이다. 

도대체 입말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월터 옹은 자신의 책 <구술문화 문자문화>에서 입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히브리어의 ‘dabar’라는 단어가 ‘말’과 ‘사건’ 두 가지를 의미하는 만큼 말은 단지 사고를 표현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 자체가 행동양식이라는 것이다. 말이 스스로 하나의 사건이라는 지적은 말이 갖고 있는 힘을 보여준다.

구술문화 속 사람들은 말에 위대한 힘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지만, 활자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말이 목소리이고, 사건이며, 필연적으로 힘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한국의 방송뉴스가 신문 뉴스에 영상자료만을 얹은 것처럼 만들어진 기원과 그 관행의 지속은 방송 뉴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옹은 구술문화의 여러 특성을 제시했다. 그 중 대상과의 밀접하고 공감적이며 일체화를 이룬다는 것과 추상적이기보다 상황의존적 또는 맥락적이다는 부분이 눈에 띈다. 일체화란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쓰기는 알고자 하는 대상에서 아는 주체를 끊어냄으로써 ‘객관성’의 조건을 세우며, 객관성이란 알고자 하는 대상에 개인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는 것을 뜻한다. 쓰기는 추상을 기르며 추상은 사람들이 서로 논쟁하는 곳으로부터 지식을 분리해낸다. 따라서 쓰기는 아는 주체를 알려지는 객체로부터 떼어놓는 반면, 구술성은 지식을 인간 생활세계에 파묻힌 채 놓아둠으로써 사람들의 투쟁 상황에 위치시킨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 현장에서 리포트하고 있는 BBC 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 현장에서 리포트하고 있는 BBC 기자.

참사를 당한 사람들과 공감하며 일체화를 이루는 기자의 모습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11월 5일 MBC에서 방송한 김희웅 기자의 ‘2022년의 가을, 우리의 이태원’이 희생자와 유족, 시청자의 편에 다가가 마음속 응어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사과를 합니다. 머리를 숙이고 잘못했다고 합니다. 사과는, 살아있는 자들을 상대로 할 뿐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다시 살아오지 못합니다. 고통은 사과로 달래지지 않습니다. 슬픔을 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슬픈 사람이 가장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정확히 알아야 슬픔과 싸우는 힘이 생기고 겨우 숨이라도 쉬면서 살아나가게 합니다.....” 구어적 특성을 지닌 김 기자의 보도는 참사를 대하는 남은 자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졌다. 

또한 입말의 구술성은 추상적이기보다 상황의존적 맥락적이다. 구술문화에서는 상황에 걸맞은 조작적인 준거 틀에서 개념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준거 틀은 인간 생활세계에 여전히 밀착해 있다는 의미에서 추상 정도가 매우 낮다. 정치인은 이제 한국의 방송 뉴스가 아니라 BBC의 뉴스를 보며 참사의 세밀한 지형도를 파악하고 있다. 사건현장에서 한 명의 목숨이라도 살리고자 고군분투했던 경찰관의 오열 섞인 인터뷰, 친구와 이태원에 갔다가 실신한 뒤 친구는 죽고 자신은 깨어난 생존자의 미안 섞인 울분은 왜 한국의 방송뉴스에서는 보기 어렵게 되었나?

그 많은 취재기자들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고 기사를 읽어나가고, 대통령과 정부의 책임을 파헤치기보다는 경찰특별수사본부의 조사 내용을 읽어나가고, 여당도 야당도 정쟁에 이용하지 말기를 제안하며 양비론으로 비판하는 보도들은 구술적 활력이 사라진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이러한 뉴스들에는 반복되는 참사의 구조적 문제를 심도 깊게 분석하거나, 자녀 잃은 부모의 애통스러운 슬픔이 담겨있지 않다. 단편적인 인터뷰와 짧은 영상으로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 

화가 나고 슬프고 미안해 죽겠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기자들도 많아 보이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기자들을 통해 뉴스를 본다. 단지 정보만을 전달받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취재한 기자의 감정과 언어표현을 통해서 사건의 심각함이나 중요성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를 눈치 채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기자들이 그 잘난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짓눌려 아무로부터 비난받지 않을 최대 공약수를 찾은 뒤에 깎아내고 깎아낸 것만을 방송 뉴스라고 전해주기에 방송 뉴스는 활력을 잃게 된 것은 아닐까. 

물론 구술성의 특성이 복잡한 사회현상을 다뤄야 하는 뉴스에 모두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대참사가 일어난 시기에 객관성이라는 미명하에 생활세계로부터 유리된 방송 뉴스를 되살릴 수 있는 실마리로 구어적 뉴스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생활경험으로부터의 거리감을 가진 방송 뉴스는 시청자를 더 구어적 미디어인 유튜브나 SNS로 내몰고 있다. 방송뉴스가 담아내지 못하는 내밀한 진실을 나눌 수 있는 외신 방송을 찾아 한국의 텔레비전을 떠나게 된다.

오늘도 방송 기자는 한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현장에 서있다. 시작하는 말을 간단히 하고는 스마트폰에 쓰인 기사를 읽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읽지 말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자신의 말로 전할 때, 참사를 겪은 유족과 시청자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세계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아프고 고통스럽고 쓰라리기까지 한 현실세계를 정면으로 직시해야, 책임자에게 호통 치며 책임을 물을 수 있고, 관리체계를 혁신하도록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 아닐까.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