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자율성 위축시키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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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PD연합회 국가보안법 폐지 의견서 제출 예정

국가보안법이 8번째 오른 위헌심판대에서 어떤 결과를 받아들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신의 잔재인 국가보안법을 두고 ‘사문화된 법’이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여전히 권력의 공안몰이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진보단체 인사들이 동시다발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의견서가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한국PD연합회가 오는 14일 제출할 예정인 국가보안법 폐지 의견서를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주
국가보안법폐지 국민행동이 지난 9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국가보안법 처벌조항 위헌성 심리 공개변론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시스
국가보안법폐지 국민행동이 지난 9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국가보안법 처벌조항 위헌성 심리 공개변론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시스

국가보안법 위헌소송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정이 조만간에 이뤄질 걸로 예상됩니다. 국가보안법 7조 1항  '찬양·고무' , 7조 3항 '허위사실 날조·유포', ' 7조 5항 '이적 표현물 소지',  2조 '반국가단체의 정의' 등이 주요 쟁점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는 전국 3000명의 PD들을 대표해 헌법재판소에 이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자 합니다. 

최소한 국가보안법 7조 1항, 3항, 5항, 그리고 2조는 폐지해야 합니다. 방송은 공공성이 중요하며,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므로 표현에 정확성과 신중성을 기해야 한다는 걸 모든 PD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프로그램에서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도 똑같이 소중하다는 점도 충분히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보안법 고발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면 PD들의 창의성이 위축되고 자기 검열이 일상화되어 방송의 퇴행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국민의 불이익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한 민변과 국가인권위원회의 입장에 동의하며, 특히 자의적으로 적용될 소지가 가장 높은 7조 1항 '고무 찬양' 조항은 제일 먼저 폐지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드라마·시사프로그램에 적용된 국가보안법  

2020년 1월 22일 <사랑의 불시착>(연출 이정효, 극본 박지은, 주연 손예진 현빈)이 북한군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담당 PD와 tvN이 고발당했습니다. 기독자유당은 “인민군 장교 리정혁(현빈 분)을 카리스마 넘치고 남한 여성을 보호하는 평화적 인물로 묘사했다”며, 이 드라마가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에 해당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정효 PD는 “<사랑의 불시착>에 북한의 생활이 나오기는 하지만 로맨스와 어우러져 드라마를 구성하는 재미의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밝혔습니다. 경찰도 로맨스 드라마를 수사하는 게 좀 심하다고 여겼는지 “허위라는 것을 적시한 드라마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한 판례는 드물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수사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21년 12월에는 “안기부를 미화하고 민주화운동을 폄훼했다”는 이유로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JTBC 드라마 <설강화>의 유현미 작가와  조현탁 감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국민신문고를 통해 고발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발인은 “한국에서 민주화운동 시대를 배경으로 간첩이 로맨스를 하고 생활을 하는 것을 그리는 것은 명백한 간첩 미화”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서, 2022년 4월에는 “운동권이 간첩에게 교육받은 건 팩트”라며 <설강화>를 옹호한 작가 이지성까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되어 서울경찰청 안보수사과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SBS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2014년 7월 <그것이 알고 싶다>‘아가와 꼽새, 그리고 거짓말 – 여간첩 미스테리’ 편을 연출한 PD는 방송이 나간 뒤 국가보안법 및 형사소송법 위반이란 명목으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한 탈북 여성이 국정원에 의해 ‘북한 보위부에서 직파한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을 다룬 내용이었는데, 담당 PD는 방송 내용이 아닌 자료 입수 경위와 취재원에 대한 질문에 ‘매우 불합리한 조사’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해당 여성은 3년형이 확정되어 만기출소 후 지금 재심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해당 PD들은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을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극도의 공포와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tvN 토일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현장포토.ⓒtvN
tvN 토일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현장포토.ⓒtvN

 ‘레드 콤플렉스’와 표현의 자유

2018년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김 위원장의 답방 여부가 화제가 된 해였습니다. 그해 12월 KBS <오늘밤 김제동>에 불똥이 튀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김정은 위인맞이 환영단’ 김수근 단장을 인터뷰한 뒤 스튜디오에 이준석 당시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신지예 녹색당 공동위원장을 초대하여 이 새로운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김수근 단장은 “왜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외칠 수 없냐고 되묻고 싶다”며, “금기를 깨고 싶었고,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왔을까, 나를 잡아갈까, 한번 보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시인 김수영이 1960년 <김일성 만세>란 시를 쓸 때처럼 ‘표현의 자유’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입니다.  

당시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통째로 넘어가고 있다”(나경원 의원), “공산당이 좋다고 했으니 북으로 보내자”(이언주 의원), “살인마 김정은을 안방까지 불러들이나”(김진태 의원) 등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튜디오에 출연한 두 정치인은 “다원화된 우리 사회에서 이걸 문제 삼는 건 촌스럽다”(신지예), “너무 급격한 변화 속에서 조금 신중할 필요는 있다”(이준석)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오늘밤 김제동>은 다행히 국가보안법으로 고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2014년 방송심의규정에 신설된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을 적용, 이 프로그램을 심의의 도마에 올렸습니다. “방송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방송해서는 안 된다”, “방송은 위법행위를 조장 또는 방조해서는 안된다”는 해당 조항은 ‘자의적 정치심의’의 우려를 낳았고 ‘국가보안법 방송심의 버전’으로 지탄받았습니다.

방통심의위가 이 조항을 적용하기 시작하면 “제작·보도의 자율성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국가보안법 자체도 문제지만, 내면화된 ‘레드 콤플렉스’가 더 본질적인 문제 아니냐는 성찰을 낳은 사건이었습니다. 

KBS <오늘밤 김제동>. ⓒKBS
KBS <오늘밤 김제동>. ⓒKBS

존재 자체만으로 자기검열 강요 효과

1990년 이후 제도권 언론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처벌을 받은 사례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고발로 이어지기 전에 이미 국가보안법의 존재 자체가 PD들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자기 검열을 유발하는 게 문제입니다. 

2018년 KBS <추적 60분> PD들은 당시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는 ‘남북경협’ 편을 편집하면서 프롤로그에 사용한 북한 노래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 다른 노래로 교체해 재편집한 바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아주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상파 방송사 가운데 KBS는 수신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될 것입니다. KBS는 개성공단 문제나 남북 정상회담 등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얘기하는 프로그램을 수 차례 방송했는데, 극우 단체들이 “국민 세금으로 만든 콘텐츠에서 북한을 우호적으로 그렸다”고 고발할 위험이 상존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하는 통일언론상의 수상작들 중 상당수는 국가보안법으로 고발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1996년 제정되어 2022년까지 28회 동안 이 상을 수상한 프로그램들은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 분위기 조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고무 · 찬양' 조항에 걸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인 제7조는 공안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조항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불시착> 고발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살아 있으며 방송 PD들이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했고, 2022년엔 뮤지컬로 제작되어 일본 공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K-드라마 열풍에 이어 뮤지컬 한류까지 가져올 수 있는 드라마인데, 바로 그 작품이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묶여 있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사문화됐다고 하지만, 최근 일부 극우신문의 사설과 김문수 신임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의 '신영복 ·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 발언, 이어진 대통령의 '종북 주사파와 협치 불가' 발언 등을 배경으로 과거의 '종북몰이'가 되살아 날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국가보안법이 다시 맹위를 떨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정부가 '종북몰이'에 앞장서지 않더라도, 일부 극우단체들이 고발하면 검찰이 수사에 나서는 형식으로 국가보안법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습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지난 9월 1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제2조 1항과 제7조 1·3·5항의 위헌 여부 심리 공개변론 시작에 맞춰 대심판정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해 이미 일곱차례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는 헌재가 공개변론을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동취재사진)©뉴시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지난 9월 1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제2조 1항과 제7조 1·3·5항의 위헌 여부 심리 공개변론 시작에 맞춰 대심판정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해 이미 일곱차례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는 헌재가 공개변론을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동취재사진)©뉴시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천명한 발언입니다. 이 점에서 국가보안법은 형평성에 맞지 않습니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 등의 발언은 별도의 제재를 받지 않고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만 적용하는 반면, 일부 좌파단체의 발언은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는 불공정한 법 시스템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직접적이고 현존하는 체제 위협이 아니라면, 이러한 의견 차이는 사상의 자유시장에 맡겨 놓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에 맞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옹호하는 게 국가보안법의 목적이라면, 자본주의의 기본 룰을 파괴하는 주가 조작이나 불법 투기를 체제 위협 사범으로 엄벌하는 게 타당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는 이러한 범죄를 단순 경제사범으로 간주할 뿐, 체제 위협 사범으로 처벌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인간 이성의 보편적 원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방송 프로그램에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사례가 많지 않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편이라도 이 법을 적용할 수 있다면, 어떤 프로그램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한류가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지금, 낡은 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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