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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관련 유실물 센터에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수거한 신발이 놓여져 있다. (공동취재사진)©뉴시스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다목적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관련 유실물 센터에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수거한 신발이 놓여져 있다. (공동취재사진)©뉴시스

[PD저널=박재철 CBS PD] 신발은 족적(足跡)을 기억하는 사물이다. 내가 간 곳, 그곳에서 뛰거나 걷거나 끌거나 한 몸의 움직임, 그리고 땅과 마찰한 빈도와 강도까지 품고 있다. 우리 몸이 땅과 만나는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신발은 몸과 땅을 매개해 밀착시킨다. 
 
신발을 ‘하나의 물건’(존재자)이 아닌 ‘사연을 지닌 흔적’(존재)의 측면에서 관찰하고 사색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신발은 그 주인의 삶을 담은 이야기로 변신한다. 
 
“닳아 빠진 구두 내부의 어둠 속에서부터 노동자의 고단한 발걸음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구두 안에는 황량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한없이 멀고 한없이 단조로운 밭고랑을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갔을, 그녀의 강인한 발걸음이 응축되어 있다. 가죽 위에는 흙의 축축함과 비옥함이 누워 있다. 
(중략)
이 사물에는 빵의 확실성에 대한 불평 없는 걱정, 또 한 번의 곤궁을 이겨냈다는 조용한 기쁨, 임박한 출산 앞에서의 불안감,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떨림이 스며들어 있다. 이 구두는 대지에 속해 있고, 농부 아내의 세계 속에서 보호받고 있다.” <‘예술작품의 근원’ 中, 1950>

하이데거는 고흐가 그린 <구두> 그림을 보고 구두의 주인을 소박한 농부의 아내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 <구두> 그림에서 고단하지만 숭고한 농촌의 삶을 읽어냈다. 

예술작품에 대한 그의 시적인 독법(讀法)이 있은 후 72년이 흘렸다. 대한민국에서는 예술작품의 세계가 아닌 참사 현실의 세계에서 가장 슬픈 방식으로 우리 앞에 남겨진 신발들이 있다.

얼마 전까지 그것들은 주인의 생명을 직접 느끼고 그 생기와 활력을 대지에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명력을 잃고 익명의 더미 속에서 누군가에게 의미화되길 기다리며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걸 정면에서 응시하는 건 고통스럽다. 

참사 후 골목길에 남겨진 신발들은 누구를 향해 무엇을 절규하고 있었을까? 어떤 신발은 점점 높아지는 군중의 압박에 못 이겨 딛고 있던 땅에서 벗어나 공중에 띄워졌을 것이다. 또 어떤 신발은 오지 않는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며 발 동동거릴 공간조차 없어 초조와 공포를 그대로 제 몸에 품은 채 주인을 잃었을 것이다. 

슬픔과 허망에 이어 증오와 분노로 “어떻게 이런? 왜 아무도? 국가는 어디에?” 이런 단말마 외마디 비명 같은 탄식들 속에서 하나둘 신발이 담고 있는 소소한 일상이 전해졌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친구들과 놀러 갔던 생기발랄했던 아들, 오랜 준비 끝에 취업에 성공해 상경한 큰딸, 한국이 무턱대고 좋아 교환 학생으로 온 타국 청년, 군에서 첫 휴가 나온 막내 이등병, 동생들의 용돈과 부모님의 생활비를 보태던 어른 같던 아르바이트생, 온기를 잃고 그렇게 순식간에 딱딱한 사물로 변해버린 158켤레의 신발들은 앞으로 더 많은 삶의 이야기를 만들 기회를 무참히 빼앗긴 채 박제가 됐다. 

지난 10일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한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 씨.
지난 10일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한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 씨.

생존자 김초롱 씨는 방송에 나와 자책했다. “이태원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리고 그를 치료하는 한 심리상담사의 말을 청취자에게 전했다. 

“당신이 가지 말았어야 할 곳을 간 게 아니라, 어디를 가더라도 국가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게 맞아요. 당신이 놀고 사치를 부린 게 아니라 그저 일상을 보내다가 참사가 일어난 것뿐이에요.”

하이데거에게 예술이란 미적 치장이나 쾌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폐된 존재의 본래 모습, 즉 진리를 드러내는 활동이 예술의 존재 이유였다. 이때의 진리란 숫자나 이름 같은 명확한 사실이 아닌, 그것이 품고 있는 사람의 사연이나 삶의 흔적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그건 비단 예술만의 책무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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