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시대, 연애 리얼리티에 빠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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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59] '커밍 업 쇼트'

지난 14일 방송된 SBS 플러스 '나는 솔로'
지난 14일 방송된 SBS 플러스 '나는 솔로'

[PD저널=오학준 SBS PD] 매주 수요일 밤, 리모컨을 든 아내의 손이 바빠진다. 사냥감을 향해 곧바로 달려가듯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누르던 손이 멈추면, 우리는 입에다 둥글게 깎은 감을 물고 연신 우물거리며 화면을 본다. <나는 솔로>의 시간은 그렇게 온다. 이미 연애를 졸업(!)한 아내에게 물었다. 왜 보는 거야? 남의 연애는 언제나 재밌지. 

현세의 비루함과 지루함이 거세된 공간에서, 오로지 사랑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짧은 시간 동안 사랑하며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행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즐겁다고 했다. 다만 완전히 현실을 잊을 만큼 예쁘고 멋진 사람들의 연애보다는, 직장에서나 친구들 모임에서 볼만한 사람들의 구질구질한 연애가 더 좋다는 개인 취향을 덧붙이면서.

결혼과 연애가 지금처럼 ‘리스크’로 여겨지는 때도 없지 싶은데,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연애 버라이어티의 파도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서 가해지는 연애와 결혼 압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판타지에 가까운 연애 버라이어티를 타고,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인 연애 전쟁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바라보는 프로그램을 즐긴다. 실제로는 안 하지만, 눈으로는 모두 연애를 한다.

제니퍼 M. 실바가 쓴 '커밍 업 쇼트'
제니퍼 M. 실바가 쓴 '커밍 업 쇼트'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는 현실 연애 대신 가상 연애에 빠진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중에서도 ‘불안한 친밀감들’이라는 장에서 실바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사회적 안전망을 파괴한 탓에 장기적으로 삶을 전망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오늘날,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것만큼 무모한 게 또 있냐고.

청년들은 안정된 경제적 기반 없이 서로에게 헌신했지만 결국 파국을 면치 못한 사람들을 목격했고, 불완전 고용, 장애, 질병, 약물,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이 산산이 부서졌던 경험도 있다. 편히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쉴 만한 사람을 찾지만, 그 욕망만큼이나 큰 두려움에 그들은 섣불리 타인과 깊은 관계 맺기를 꺼린다. 가족도 무너지고, 가족 바깥의 제도들도 수준 미달인 상태에서 ‘헌신’은 꺼림칙한 리스크다. 고립이, 그들에게 유일한 선택지처럼 보인다.

연애 버라이어티의 범람은, 이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가랑이가 점차 벌어지는 젊은 세대의 불안함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닐까? 친밀감에 따른 리스크를 감당할 수는 없지만, 대리 만족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TV 앞으로 향한다. 앞 세대의 어른들처럼 연애, 결혼, 취직을 하고 ‘어른’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청년들은 방황한다. 그들이 자기의 성장을 증명하고 자신감을 획득하고자 어떤 방법들을 택하는지 추적하는 책의 내용을 따라가 보면, 대리 만족의 의혹은 더욱 짙어 진다.

개인을 사회의 수많은 위협에서 보호해주던 다양한 제도들이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해체되고, 그 미비한 제도들에게 배신당한 경험은, 젊은 청년들로 하여금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믿을 것은 자신이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것도 자신이다. 질곡을 벗어날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그러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감정을 다스리고 능력을 계발하는 것만이 믿을 구석이니, 서로 의지하는 ‘연대’는 마치 부도덕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시위는, 그러니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칭얼거리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말마따나 “미국 산업의 소멸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정책의 부상이 초래한 불안전 및 불확실의 정치경제”가 사람들의 인생 경로를 불확실한 상태로 내몰았다. 사회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자유를 얻었지만, 다시 과거의 연결과 제약을 갈구하는 허무함도 얻었다.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지는 시대에 성장한 노동 계급 남녀에게 불확실성은 자연적 조건이다. 그러니 우리를 괴롭히는 세계를 바꾸는 대신,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를 택한 이들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극장가 화제작으로 떠오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틸사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틸사진.

자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계발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성공시키는 거대한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 오늘날 대중의 보편적인 마음가짐인데, 이 무한한 긍정은 손쉽게 자기 혐오로 전락하기 일쑤다. 뭐든 가능한데 무엇도 못한다면 우울에 시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최근 개봉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조이와 에블린을 괴롭히는 무력감을 떠올려보자. 모든 평행 우주에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나면,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비루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든지 파괴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답이 없어 보인다.

물론 영화는 그렇게 염세적이지 않다. 에블린은 어쨌든 무력한 우울감을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최악의 상태인 지금의 에블린으로 살아가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실바도 책 말미에 비슷한 말을 한다. 자기 계발하라는 명령에 압도당한 상태에서도, 누군가는 그게 정말 맞는 말인지 고민하며 균열을 낸다고.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연대의 희미한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게 책의 결론이었다. 

판타지를 낳는 세계의 변화가 없다면, 판타지를 못마땅해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연애 버라이어티가 문제가 아니라, 연애 버라이어티가 비혼의 시대에 인기를 끄는 현실이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의미가 있겠지. 신자유주의가 현실의 연애를 죽인 자리에, 연애 버라이어티가 피어난다면 우리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자리에 얼마나 많은 핏자국들이 남아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다 사라지고 나면, 이제 누가 방송을 봐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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