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월드컵에서 보여준 이란인들의 침묵과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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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도 악당도 없는 세상 9]

지난 11월 22일 MBC 뉴스데스크 뉴스 화면 갈무리.
지난 11월 22일 MBC 뉴스데스크 뉴스 화면 갈무리.

[PD저널=박정욱 MBC PD] 2022 카타르 월드컵은 여러 논란과 화제를 뿌렸지만 나는 단연 이 장면에 시선이 꽂혔다. 이란 선수들이 보여준 침묵과 응원석의 이란인들이 호응한 눈물. 11월 21일 카타르 알라이얀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1차전 이란과 잉글랜드의 경기가 펼쳐졌다. 이 경기는 6-2 잉글랜드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세간의 화제가 된 대목은 경기 결과가 아니었다.

경기 시작 전 이란의 국가가 울려 퍼질 때 이란 선수들은 서로 어깨를 걸고 침묵했다. 아무도 국가를 따라부르지 않았다. 어느 선수도 왜 국가를 따라부르지 않았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SNS와 언론은 선수들이 이란에서 ‘히잡 거부 운동’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지지의 뜻을 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월드컵을 중계하던 이란 방송사는 해당 장면에서 중계를 일시적으로 중단했고, 이란의 언론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저 선수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당국으로부터 매몰찬 징계와 탄압을 당하지 않을까. 아마 당장 경기가 끝나고 정부로부터 무지막지한 압력이 이란 대표팀에게 들어올텐데, 어쩌면 저들의 가족들까지 위험에 처하진 않을까. 선수들이 정상적인 멘탈로 경기에 임할 수 있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25일 열린 이란과 웨일스 간의 예선 경기에서 이란 선수들은 1차전과는 달리 국가를 따라 불렀다. 하지만 대부분 표정이 어두웠으며 작게 입술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당국으로부터 ‘한 번만 더 까불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았으리라. 

그런데 이란 관중석에서 범상치 않은 반응이 보였다. 이란 선수들이 조용히 국가를 따라 부를 때 오열을 하는 한 이란 남성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잠시 후 눈물을 흘리는 중년 이란 여성의 모습 역시 카메라에 담겼다. 물론 이란 관중석 대부분은 열광적인 응원의 분위기였으나 누군가는 이란 선수들에게 눈물로 답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 울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란인들이 첫 경기에서 선수들이 보여준 침묵에 대한 화답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많은 이란인들이 선수들의 안전을 걱정했을 것이고, 마지 못해 국가를 따라부르는 선수들에게 안쓰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이란이 막판에 두 골을 몰아넣은 것이다. 난 이란이 16강에 진출하길 기원했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이란 정부라 하더라도 16강에 진출한 영웅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지 않겠는가. 

지난 11월 22일 뉴스데스크 뉴스 화면 갈무리.
지난 11월 22일 뉴스데스크 뉴스 화면 갈무리.

이란에서는 지금 거대한 반정부 물결이 일고 있다. 1979년 혁명을 통해 들어선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정의와 풍요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집권세력은 미국의 제재 탓이라고 주장하지만 국민들은 믿지 않는다. 각종 특혜와 특권을 독차지한 혁명수비대와 신정체제의 기득권 세력들을 보면서, 외부의 제재가 없었어도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선거는 치러지지만 후보자들을 혁명수호위원회가 걸러내는 시스템을 통해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인물들이 입후보하지 못한다. 또한 정당활동도 매우 제한된다. 게다가 신정체제를 내세운 이란 정부의 이슬람주의는 국민의 삶을 억압한다. 특히 여성에 대한 보수적 억압이 이어지면서 급기야 히잡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에 참석했던 20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국민적 분노로 이어졌다.

억눌려 왔던 각종 불만들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란 당국은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역력하지만 주도자들을 사형시키는 등 초강수로 대응하는 중이다. 나는 앞으로도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이야기하면 자연스레 이란 선수들의 침묵과 관중들의 눈물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2023년은 전세계적으로 각종 암울한 예측들이 난무하지만 무엇보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삶이 힘들어진 가난한 나라의 불만에 찬 이들이 어려움을 버텨내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이 더 이상 현실을 그저 견디기만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세상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그것이 별일 없이 지내는 다른 이들의 일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2023년을 거대한 불확실성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가장 나쁜 상황이 도래하기 전에 모두가 현명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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