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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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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하루키의 말이다. 자유인, 꼭 소설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은 많은 경우 꿈으로 끝난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기어이) 좋아하지 않은 것을, (사정없이) 좋아하지 않은 때에, (강압적으로) 내가 아닌 남이 정한 방식으로 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유년의 학교든, 청년의 군대든, 중년의 회사든 자유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정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모 밑에서는 말할 나위 없고 정작 자신이 부모가 되서는 더욱 더 요원해진다. 최근 오래된 나의 친구 하나가 그 사실을 일깨워줬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그 친구는 아이 둘을 뒀다. 둘째가 14살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다. 고정된 성 역할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아이는 암벽 등반, 권투, 주짓수 등으로 촘촘히 쌓은 벽돌 같은 신체를 키웠다.

학교 일진에서는 집요한 설득 끝에 아이를 서클에 끌어들였다. 으레 그렇듯 금기된 술과 담배, 험한 규율과 군기, 날카로운 욕설과 모욕주기 등이 난무하는 입단식이 있었고, 누군가 이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교내에 퍼진 이 영상을 확인한 학교는 가만있지 않았다. 학부모를 불러 그 자리에서 아이의 퇴학 조치를 통보했다. 

잘못을 십분 인정하더라도 어린 나이의 퇴학은 아이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처벌이었기에 친구는 고심했다. 그리고 학교에 제안을 했다.

“앞으로 제가 반성문을 쓰겠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5주간 쓴 제 반성문을 딸에게도 읽히겠습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께도 제출하겠습니다. 이 반성문 내용과 아이의 태도 변화를 보시고 학교에서 그 후에 다시 판단해주십시오.” 

지난 9월 22일 2022년 전국 학교 사이버폭력 실태조사 발표 기자회견에서 푸른나무재단 관계자들이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뉴시스
지난 9월 22일 2022년 전국 학교 사이버폭력 실태조사 발표 기자회견에서 푸른나무재단 관계자들이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뉴시스

뜻밖의 제안에 학교는 한발 물러섰고 몇 주간 친구는 머리를 싸매고 반성문을 썼다. 모든 글쓰기는 나름의 고충을 그 값으로 요구하나 반성문만큼 고통스런 글쓰기도 드물다. 이것이야말로, 쓰고 싶은 내용을, 쓰고 싶을 때에, 온전히 내 방식대로 써야 그나마 겨우 써내려 갈 수 있는 글이다. 진정성 없이는 극히 형식적인 글이 되기 십상인 이 반성문을 친구는 매주 묵묵히 썼다. 사랑니를 앓는 사람처럼 끙끙거리며. 

“아빠는 하루 평균 10건의 결정을 내려야 하고, 30통의 업무와 관련된 메일을 받고, 3건의 회의에 참석한다. 이렇게 투자한 시간만큼 또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의 무게만큼 급여를 받는다. 그리고 아빠와 관계한 사람들의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 아빠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중요한 소수를 위해 다수의 희생을 모른 척 해야 하는 결정을 할 때다. 결과를 알기에 괴롭고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너를 생각하며 그래도 최대한 네게 부끄럽지 않게 결정을 하려고 노력한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니? 네가 찍은 발자국을 보고 뒷사람은 길을 찾는다고. 작든 크든 하나의 결정은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아빠는 네가 그걸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관계, 경청, 평판, 인정, 마음” 등을 열쇳말로 친구는 딸에게 보내는 서신 형태로 반성문을 썼다.  읽다보면 마치 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듯싶었다. 

글의 곡진함 때문인지 다행히 딸아이는 퇴학을 면했다. 술자리에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고심 어린 그의 반성문을 읽으면서 우리 세대에 ‘하루키의 자유인은 신기루’라고 결론 내렸다. 좋아하는 대상을 선택하고 그 시기 그리고 방식까지 자기 결정권 아래에 두기란 실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중 하나만이라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선방이지 않을까. 지금 ‘참회’라는 느닷없는 숙제 앞에 친구는 그 방식만은 자유롭게 선택한 셈이다. 간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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