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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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조명 시인이 대표로 있는 문학관의 전경. ©조명 시인
횡성에 있는 '예버덩 문학의 집' 전경. ©조명 시인

[PD저널=박재철 CBS PD] 생애 첫, 독립된 공간은 군 제대 후 들어간 고시원이었다. 두 평 남짓으로 소음에 취약했지만 나름 안락하고 평온했다. 4남매가 얽히고설키며 자라온 탓에 나만의 방은 오랜 꿈이었다. 

당시 접한 박영한의 <지상의 방 한 칸>은 마치 내 처지를 소재로 삼은 소설 같았다. 한 지붕 아래 네 가구가 모여 사는 곤궁한 현실에서 창작공간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이야기다. 오디세이 같은 떠돎 끝에 주인공은 시내 변두리, 작은 다락방에 안착하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글쓰기와 공간, 그 둘 사이의 밀접한 상관관계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으로 더 너른 설득력을 얻는다. 두 번의 대학 강연을 정리한 이 책에서 그는, 후세에 인용 빈도가 높은 말을 남겼다.

“한 개인이 최소한의 행복과 자유를 누리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과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현 가치로 약 4500만 원이 넘는 500파운드는 지금으로서도 요령부득인 경우가 많겠으나, ‘자기만의 방’ 만큼은 시대를 떠나 글쓰기에 전제 조건이 될 법하다.

물이 고이려면 움푹 팬 골이 있어야 하듯 생각이 고여 글이 되려면 지상의 방 한 칸은 필요하다. 시간이 응축되는 공간,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은 비단 글쓰기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싹을 틔우는 데도 주요한 밑거름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의 문제의식을 일깨웠다면, 아래 소개할 소설가와 시인은 그 ‘밑거름’을 현실에서 구현한 분들이다. 그들이 마련한 공간에 머문 경험은 작가가 아닌 나에게도 무척 값졌다.

원주에 있는 ‘토지문화관’은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마련한 레지던스형 창작공간이다. 그릇에 다소곳이 담긴 쌀밥처럼 오봉산 자락에 살포시 얹어진 이곳은 이미 국내외 작가들에게 꽤 인기가 높다. 

“작가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생명과 생존이 첫째고 정치나 예술은 둘째입니다. 생명과 생존 이상의 진실은 없습니다. 그게 있음으로써 문학도 있는 거죠.”

생전 그분의 말처럼, 선생은 손수 텃밭에 채소를 길러 입주자들을 먹였다. 토지문화관은 꼭 글을 쓰지 않더라도 글을 읽게 하는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다. 그 힘에 기대, 나는 선생이 25년간 가다듬었던 <토지>를 완독할 수 있었다.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토지문학관.

조명 시인은 횡성에 ‘예버덩 문학의 집’을 열었다. '높고 평평한 들'이라는 뜻의 버덩에 '옛'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문패로 삼았다. 주천강을 앞에 두고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이곳의 지형을 시인답게 말맛을 살려 붙인 이름이다. 

정확한 언어를 찾고 문장에 리듬과 호흡을 불어 넣기에 안성맞춤인 예버덩은 조 시인의 시아버지가 남긴 땅을 물려받아 세워졌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소박한 시 낭송회가 열린다. 이름 모를 꽃들 사이에 ‘꽂혀’, 풀벌레 소리를 배음(背音)에 깔고 시 낭송을 듣는 여름밤의 풍경은 무척이나 몽환적이다. 

현실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힘이 비판력이라면 현실, 그 너머를 내다보는 힘은 상상력이 아닐까? 비판력과 상상력을 키우는 자기만의 방, 그 창작의 인큐베이터는 오롯이 작가들에게만 필요한가? 아니다. ‘창작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에서도 자기만의 영토는 확보되어야 한다. 한 평이 아니라면 책상 하나의 크기라도 온전히 자신을 의탁할 쉼터는 절실하다. 그칠 줄 모르고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고단한 삶의 탄식 저음을 내려놓을 곳도, 나이가 쌓일수록 대외비로 분류돼 쌓여가는 내밀한 사연들을 조용히 갈무리해야 할 자리도,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자력으로 이 지상에 자기만의 방을 마련한 이는 행운아다. 애를 써도 그것이 어려운 이들에게 그런 거처를 조력해주는 사람들, 말해 무엇할까마는 그들은 더없이 복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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