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PD 정신 기린 '이성규상'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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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와 독립PD 간의 상생 노력" 이유로 받은 '이성규상'
독립PD대상 시상식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수상 소감

지난달 27일 열린 독립PD대상 시상식에서 이성규상을 받은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이 동료 PD들에게 꼭 전할 말이 있다며 수상소감을 보내왔다.-편집자주
지난달 27일 열린 한국독립PD대상 시상식에서 이성규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말하고 있는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독립PD협회
지난달 27일 열린 한국독립PD대상 시상식에서 이성규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말하고 있는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독립PD협회

[PD저널=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저 혼자라면 과분한 이성규상을 감히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PD 사회의 정의를 갈망하는 모든 PD들에게 주는 상이기 때문에 제가 일단 무대에 올라가서 수상한 것뿐입니다. 영예로운 수상 소식을 동료 PD들에게 알리고, 이 상의 의미를 공유하는 게 저의 의무입니다. 상을 주시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귀하는 방송제작현장에서 방송사와 독립PD의 상생과 협력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해 오셨습니다. 특히 기울어진 독립제작 환경의 제도적 개선을 다양한 방식으로 대내외에 제기하는 등 우직한 동료애를 몸소 실천해 오셨습니다. 이에 독립PD의 마음을 담아 이 상을 드립니다.”

시상식 전날 '이성규상'을 받는다는 연락을 받고 이 상의 의미와 무게 때문에 앓아누울 지경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독립PD 한분의 얘기를 듣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故 이성규 PD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독립PD의 우군이 돼 줄 지상파PD가 너무 적어서 안타깝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은 저 개인이 아니라, 정의로운 PD사회를 추구하는 모든 지상파PD들에게 주는 상이 분명합니다.  

돌이켜 보건대 촛불혁명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선 2017년은 PD연합회 창립 30주년이자 6월항쟁 30주년이었습니다. PD연합회는 권력의 방송장악에 맞서서 표현의 자유와 방송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촛불혁명 이후 PD사회에 공정하고 정의로운 관계가 수립되지 않으면 그동안의 방송민주화운동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것이며, PD연합회의 존립기반도 없어질 것이라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故 박환성·김광일 PD의 희생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은 절박한 실천 과제가 됐습니다. 

사실 성과는 미미했습니다. PD연합회에 상생특위와 불공정행위신고센터를 만들고, 토론회를 열고, 성명서를 내고, <한국PD연합회 30년사>와 <2022, 한국PD의 자화상>이란 책자에 독립PD들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변화는 참으로 느렸습니다.

생각건대 이 문제는 한국 미디어 생태계를 바로 세우고, 나아가 한국 사회를 좀 더 정의롭고 인간다운 세상으로 바꾸는 일과 연결되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PD들의 노력은 물론 사회의 인식 개선, 나아가 경제민주화 및 정치권력의 변화까지 필요한 거대한 과제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이뤄질 수도 없고, 한두 명의 개인이 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큰 바위를 쪼개듯 여러 사람의 작은 노력이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 거대한 변화를 이뤄낼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지상파 PD 중에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뜻을 실천하려면 사측과 대립해야 하는 부담이 커서 잘 안 보일 뿐이지요. 지난해 <2022, 한국PD의 자화상>에 담긴 포커싱그룹 인터뷰에 참석한 PD들의 발언 일부를 소개합니다. 

“내가 맡은 프로그램은 독립PD들이 안 계시면 프로그램 문을 닫아야 한다. 노하우가 있는 분들이니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지상파는 방송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상파 플랫폼은 훌륭한 독립PD들과 그들의 콘텐츠에 대해 최대한 열려 있어야 한다. 저작권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 제약을 풀어야 한다.” 

“갑질을 하는 분은 독립 PD들과 못 만나게 회사 차원에서 인사조치를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서로 신사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콘센서스가 필요하다. 금전적인 보상을 확실히 해야 하고, 지금 옆에 있는 독립 PD가 적절한 돈을 받고 있는지 관리자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보다 조금 나아진 건 분명한데 속도를 좀 더 내야 하지 않을까. 저희 프로그램은 노동 문제를 다룰 때마다 ‘너희들은 잘 하고 있냐’ 소리를 듣는다. 아직도 개선할 점이 많아 보인다.” 
 

분명 한계는 있었습니다. 2017년 PD연합회 좌담회에서 MBC 오행운 PD는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PD 집단은 도제 시스템에 의해 후배를 양성해 왔고 내부 적폐에 지속적으로 눈감아 왔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PD들도 방송이 안 나갔다는 이유로 작가, 프리랜서들에게 돈 안 주며, ‘이게 회사 방침이자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를 앞장서서 싸워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TBS 사장을 역임하신 이강택 PD는 PD사회의 속성을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자본이 경쟁의 질서를 만들 때, 플랫폼들을 분할시키고 노동을 분할시킬 때 얼마나 날카롭게 저항했는가? 거의 대응하지 못했다. 독립PD들, 비정규직PD들과 충분히 함께 아파하며 제대로 된 변화를 모색했느냐, 아니었다. 외주정책을 비판하면서도 자사이기주의를 버리지 못했다. 협찬 문제도, 일단 자기 프로그램을 위해 대작주의를 추구하면서 자본의 이익에 굴종한 측면이 있다. 이런 게 쌓여서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PD연합회로 상징되는 PD집단의 정체성은 무엇이었나? 냉정하게 보면, 정권의 탄압을 뚫고 저항을 선도하기에는 너무 유순하고, 자본의 포획을 뿌리치기엔 너무 영악한 존재가 PD집단 아니었나?”

이러한 자성의 소리에 공감하는 PD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제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2020년 4월 20일, EBS와 독립제작사협회·한국독립PD협회가 ‘상생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에 서명한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10개월 동안 당사자들이 맞대고 논의한 결과, 협력제작 프로그램 판매 수익을 EBS와 협력제작사가 절반씩 배분하고, 협력제작사가 협찬을 유치할 경우 EBS가 떼어가는 간접비를 현재 20% 수준에서 10%로 낮추는 게 골자였지요. 아울러, 협력제작사가 촬영 원본을 활용해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도록 저작권을 일부 공유하도록 했습니다. 이 선언이 정착되려면 표준계약서 개정 등 제도 정비가 뒤따라야 하지만, 선언 자체만으로도 큰 진전이었습니다. 

PD연합회도 상생협약 체결 직후 성명을 발표, “대화와 타협과 인내로 이뤄낸 첫 성과를 소중히 가꾸고 키워 나가길 충심으로 기원한다”고 밝혔지요. 이러한 실천이 줄기차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포커싱그룹 인터뷰에 참여한 어느 독립PD의 지적처럼 “우리는 모두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다”는 게 현실임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지난해 PD연합회가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이러한 상생협약이 KBS, MBC, SBS 등 여러 방송사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다수 PD들이 공감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독립PD든 지상파PD든, 우리 PD들 모두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일한 희망의 근거이며, 연대와 실천으로만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규상의 의미와 무게를 다시 생각합니다. 이 상은 ‘독립PD정신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2014년부터 지원준, 이승구, 김영미 PD 등 치열한 노력으로 성과를 이룬 독립PD들에게 시상했고, 2018년에는 故 박환성·김광일 PD, 2021년에는 故 이재학 PD를 추모하는 눈물의 상이 되었습니다. 2019년부터는 독립PD가 아닌 분 중에서 정의로운 방송생태계를 위해 노력하신 분에게 드리기로 방침을 바꿨다고 합니다. 지난해는 상생협약 체결에 공이 크신 EBS 김유열 사장(당시 부사장)께서 수상하셨습니다. 이 사실만 봐도 저 개인이 이 상을 받은 게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지요. 정의로운 PD사회를 위해 모든 PD들이 더욱 치열하게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두려운 상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전의 이성규 PD를 뵙지 못했습니다. 이승준 PD가 <PD저널>에 쓴 추모글 <선배, 잘 가요. 잘 가요!>를 다시 읽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성규 PD는 2007년 한국독립PD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초대 독립PD협회장을 맡으신 분입니다. 초대 협회장에 나서면 ‘갑’인 방송사에 찍힌다며 여러 독립PD들이 두려워 할 때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엄연히 한 가정의 가장인데도 말이죠. 동료 PD들은 그가 얼마나 당당한 사람인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인지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는 독설가였다고 합니다. 특히 방송사의 횡포와 불합리한 구조에 분노하여 이를 삭이지 못하고 뱉어내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이승준 PD의 <달팽이의 별>과 박봉남 PD의 <아이언 크로우즈>가 암스테르담에서 상을 받았을 때 자기 일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신 분입니다. 박혁지 PD의 작품이 독일과 공동제작하기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병상에서 듣고 “아이고, 아이고…. 그래 잘 됐다” 링거주사가 꽂혀있는 손을 들어 손뼉을 치신 분입니다.  

<오래된 인력거> 이성규 독립PD ⓒPD저널
<오래된 인력거>를 연출한 故 이성규 독립PD ⓒPD저널

그는 인도로 촬영을 떠나기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만드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신물이 나. 난 인도에 갈 거야. 가서 오랫동안 살면서 충분히 느껴지는 이야기를 담을 거야.” 인도 인력거꾼의 애환을 10년간 담아낸 다큐멘터리 <오래된 인력거>입니다. 그는<보이지 않는 전쟁–인도 비하르 리포트>, <신과 재혼한 여인들>, <어떤 귀향>, <은둔의 땅, 무스탕>, <나이나와 상카르의 시네마 천국>, 그리고 유작인 <시바, 인생을 던져> 등의 역작을 만드셨고, 2013년, 한창 일할 나이인 50세에 간암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날, 2013년 12월 11일 춘천 다큐영화제 <시바, 인생을 던져> 개봉 상영회에 참석, 마지막 남은 힘을 토해내듯 큰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한국의 독립예술영화를 사랑해 달라”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성규 PD께서 애통하게도 일찍 돌아가신 것은,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그만큼 많은 숙제를 남기셨다는 뜻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비관적인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들기도 합니다. 볼프 비어만은 “이 시대에 희망을 설파하는 사람은 사기꾼이지만, 절망을 설파하는 사람은 개XX”라고 했지요? 함께 아파하고 함께 노력하는 사람이 있기에 마지막 희망도 있는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故 이성규 PD의 부인께서 직접 상을 주셔서 더욱 영광이었습니다. 현직 PD 시절 상을 많이 받은 편이지만, 이 상만큼 벅차고 영예로운 상은 없었습니다. 정의로운 PD로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저와 함께 상을 받으신 모든 동료 PD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따라서, 이 상패는 집에 가져가지 않고 PD연합회 사무실에 이 글과 함께 오래도록 보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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