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 도사리는 식인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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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62] '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유치원 교사들이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전국교사결의대회를 열고 정부의 유보통합 전면 철회 및 유치원 공공성 강화, 유아 만 5세 의무교육 실시, 방과후 과정과 돌봄 인력 및 예산 확대, 사립 유치원 회계 투명성 강화, 연령별 기관 일원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유치원 교사들이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전국교사결의대회를 열고 정부의 유보통합 전면 철회 및 유치원 공공성 강화, 유아 만 5세 의무교육 실시, 방과후 과정과 돌봄 인력 및 예산 확대, 사립 유치원 회계 투명성 강화, 연령별 기관 일원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작년 9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국무회의에서 ‘외국인 육아도우미 도입’ 정책을 제안했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낮은 출산율로 인한 한국의 인구 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비교적 경제적 부담이 덜한 외국인 가사 도우미를 공식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것이다. 한국인 육아 도우미를 고용하면 월 200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싱가포르인 가사 도우미는 월 30~70만 원 정도면 고용이 가능하므로, 맞벌이 가정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게 서울시장의 계산이었다.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따져보기 전에, 서울시장의 발언이 흥미로운 지점 두 가지를 짚어보자. 하나는 출산율의 급격한 감소라는 ‘재생산’의 위기를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양육비용이 맞벌이로도 감당키 어려울 만큼 상승한 것도 사실이지만, 돈만 있다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두 번째는, 조금 더 본질적인데, 이 위기를 제3세계 주변부 국가의 저임금 여성 노동자를 고용하여 떠넘기려 한다는 점이다. 

일정한 수준 이상의 수입이 있어서 고용이 가능한 맞벌이 가계는 이 정책의 도입에 찬성할 수 있다. 반면 그렇지 못한 가계는 고용하지 못한 ‘죄’로 양육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이러한 사회적 재생산 영역에 대한 투자를 철수하는 데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맞벌이 여성 노동자의 ‘해방’인 동시에, 주변부 여성 노동자의 ‘수탈’이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복지 축소를 유도하며, 그 빈자리를 여성 노동자의 유급화, 가사노동의 상품화로 메꾼다. 물론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는 중요한 진전이다. 젠더화된 분업과 그에 따른 임금 격차는 해소되어야 한다. 몇몇 남성 임금노동자들의 소망처럼 집에 남아 ‘애나 봐라’는 가부장의 시대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맞벌이’에는 분명한 ‘함정’이 도사린다. 

한 가족의 재생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증가했지만, 이를 보조하던 국가의 복지는 사라졌다. 임금 상승을 이끌던 노동조합의 힘은 분쇄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벌지 않으면 ‘중산층’으로 살아가기 버거워졌다. 하지만 양육의 책임은 오로지 개별 가정의 것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가사 노동을 주로 담당하는 여성의 몫으로 남았다.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의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으니, 맞벌이가 ‘해방’인 것은 절반만 진실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인클로저로 인해 ‘토지’로부터 해방된 것이 이중적인 의미이듯, 맞벌이도 그러하다.

낸시 프레이저의 'Cannibal Capitalism'
낸시 프레이저의 'Cannibal Capitalism'

낸시 프레이저만 이 이중적 해방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 질서를 지탱하고 있는 재생산 노동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급 노동으로 치부하고, 무급이기에 가치 없는 것으로 계산하고, 외부로부터 불투명한 개별 가정 내로 은폐하고, 여성에게 집중시키며 종속을 구조화하는 문제는 예전부터 지적된 바다. 다만 <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에서 낸시 프레이저가 드러내는 독특함이 있다면, 이러한 생산의 ‘숨겨진 장소들'인 인종, 여성, 자연, 정치의 차원에서 반복되는 자본주의 고유의 운동 법칙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낸시 프레이저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은 생산과 재생산을 분할하고, 생산의 토대가 되는 재생산을 수탈하는 데 있다. 이는 분할-의존-책임 회피-불안정화라는 네 가지의 단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근본적 모순은 인종, 자연, 돌봄, 정치의 네 영역에서 반복되며 상호 연관된다. 이 모순은 역사의 네 국면(중상주의-자본주의, 자유주의-식민주의, 국가-관리,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다. 

그는 자본주의를 “젠더 지배, 생태계 악화, 인종적·제국주의적 억압, 정치적 지배와 구조적으로 중첩”된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이해한다. 단순히 생산 영역만이 자본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그 생산 영역의 존속을 위해 뒷받침되어야 할 비생산 영역에 의존하면서도 그 존재를 은폐하고, 수탈하면서도 책임은 회피하는 불안정한 ‘사회 질서’로서 더 넓게 이해하길 요청하는 것이다. 이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대하는 ‘접합부’는 모순의 거처다. 원저 <Cannibal Capitalism>의 표지에 우로보로스(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가 그려진 이유다.

하나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이 자기잠식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연의 오염은 인종적·제국주의적 수탈과, 사회적 재생산, 그리고 정치적 대표의 문제와 내적으로 연결된다.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인종은 수탈의 대상이 되며, 그들의 거주지는 ‘무주공산’으로 여겨져 수탈당한다. 그리고 오염된 자연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사회적 재생산에 가해지는 고통은 배가된다. 그러니 이에 반대하는 투쟁 역시, 다양한 영역의 경계를 두고 벌어지는 경계투쟁을 한데 아우르는 공동의 전선을 수립하는 데로 이어져야 한다.

자본주의에 맞서는 공동의 전선을 수립하자는 주장은 몇몇 정치철학자들과 공명한다. 예컨대 파울로 제르바우도는 <거대한 반격>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외향의 정치가 파산하면서 신국가주의라는 내향의 정치로 귀환하려는 경향이 다양한 정치세력들의 경합 속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더 나은 미래로 이행하기 위한 대항 헤게모니를 형성할 것을 요청한다. 샹탈 무페 역시 오늘날의 경제적, 사회적, 생태적 위기에 맞서는 포퓰리즘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최종적 목표와 구체적 전략은 다르지만, 공히 절박한 체제 전환을 요청한다.

물론 난점은 있다. 예컨대 구시대적 모성을 요구하는 보수화된 노동계층과, 페미니스트는 장기적으로 안정된 대항 헤게모니를 형성할 수 있는가? ‘대항 헤게모니’를 이야기하는 지식인들은 이 이질적인 결합을 극복할 구체적 전략과 자원을 제시하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인민’으로 새로 주조되면 해결되는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이들은 제대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의문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지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번 대결할 필요가 있는 책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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