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 - 정부수립 50주년 특집다큐멘터리 「격동, 반세기의 통치자들」 제2편 ‘북진통일, 이승만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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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식 반공주의 망령은 현재도 존재한다
최승호

|contsmark0|문화방송이 ‘정부수립 5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로 내놓은 「격동, 반세기의 통치자들」 은 방송되기 불과 ‘3달 전’에 기획되었다. 기획 후 자료조사에 한달, 섭외 및 촬영에 한달 남짓, 후반 작업에 20일 가량을 썼다. 그나마 이것은 1편과 2편의 경우고 3편(장면)이나 4편(박정희 2부작)은 총 제작기간이 두 달에 불과했다. 아마도 오랜 다큐멘터리 전통으로 무장한 길 건너 동료들이 듣는다면 ‘웃기는’ 일이 될 터이지만 mbc로서는 그럴듯한 기획이었다. ‘인간시대’의 찬란했던 과거가 아직 프로듀서들과 간부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mbc의 입장에서는 석 달이란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담당 pd들에게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기획이었다. 그동안 mbc는 역사를 천착하는 큰 기획물을 제작한 바가 없다. 오히려 드라마에서는 각 공화국들을 조명하기도 했지만 다큐멘터리는 그렇지 못했다. 이것 또한 mbc적인 현상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드라마 양식을 차용해 우회해서 서술함으로써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드라마가 역사를 찾아나서는 동안 mbc 다큐멘터리는 ‘뭔가 재미있는’ 건수를 찾아 헤매왔다. 이런 관행이 pd들의 가슴속에 mbc 다큐멘터리에 대한 깊은 회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따라서 이번 기획이 확정되자 pd들은 그 무게에 중압감을 느끼면서도 가보지 않았지만 가야할 길을 나서는 설렘마저 느꼈던 것이었다.
|contsmark1|기획이 확정된 뒤 나는 이승만 편을 제작하도록 결정되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는 이미 30여년 전에 폐기된 인물이었다. 몇 년 전 조선일보가 그를 되살리려 이벤트를 꾸며보았지만 ‘이미 잊혀진 독재자’로서의 이미지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그 인물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은 pd로서 부담이었다. 그를 되새겨 보는 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약 보름간의 기초 자료조사를 진행한 뒤 나는 이승만에게 숨겨진 놀라운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북진통일론이었다. 그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할 때부터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전쟁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고, 전쟁전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을 무력으로 수복하겠다고 선언했으며, 휴전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전쟁 이후에도 북진을 하려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산주의를 박멸하기 위한 세계대전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나는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램을 꿸 논리를 발견한 것이다. 북진통일론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 논리는 경쟁자를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의 독선적인 성격, 그의 단호함, 냉전을 예견한 능력, 그리고 그를 국부로 모시며 50년대 내내 북진통일을 외쳐야 했던 당대의 한국인들이 가슴속에 품은 분단에 대한 원망과 전쟁의 참화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매력적이었던 점은 북진통일론이 대중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승만을 비판했지만 주로 ‘독재자 이승만’에 관해서였다. 조선일보 등도 이승만 되살리기를 하면서 ‘독재자 이승만’이라는 국민감정을 희석시키는 데만 열중하고 북진통일론은 철저히 외면했다. 나는 그들의 외면이 이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진통일론이야말로 ‘보수 우익’을 자처하는 이 땅의 극우세력이 집요하게 추구해온 반공주의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반공주의가 그토록 처참한 희생을 당연시하고 민족의 생존을 이념 전쟁에 내맡기는 반민족적 속성을 가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그들이 바랄 리 없다.나는 북진통일론이라는 주제를 설정한 뒤 팩트를 주워 모으기 위한 2차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한계에 부닥쳤다. 이미 두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방송시간에 대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조사를 중단하고 촬영에 나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선 꼴이었다. 대강의 자료조사는 막연한 질문을 낳았고 인터뷰 대상자들의 모호한 답변으로 돌아왔다. 정확하게 팩트를 제시하며 파고드는 질문을 하기에는 너무 무식한 인터뷰어였다. 게다가 영상자료 확보가 필수적인 프로그램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용가능한 자료가 얼마나 있는지를 제대로 확인 못한 채 촬영에 뛰어든 것은 나를 내내 괴롭혔다. 수백 권의 자료테이프를 일일이 보자니 편집실도 없으려니와 절대 시간도 모자랐던 것이었다. 그저 자료목록을 확인한 정도였는데 나중에 편집을 하려고 보니 상당수가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다만 촬영을 하면서 틈틈이 작성한 사전 구성안이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을 적지 않게 수행했다. 몇가지 즐거움도 있었다. 난생 처음 말로만 듣던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자료를 찾은 3일간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도대체 무슨 자료가 있는지 사전에 확인도 못한 채 무작정 찾아간 것이었지만 거기서 찾아낸 각종 스틸 사진들은 프로그램에 유용하게 쓰였다. 영상자료의 경우는 복사과정도 복잡하고 비용도 만만찮아 포기하다시피 해야 했다. 세계 곳곳에서 온 다큐멘터리스트들이 하나하나의 영상 자료들을 꼼꼼히 확인하며 쓸 부분을 체크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그네들과 우리의 간격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준비한 프로그램들이니 결국 살아남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은 비용과 노력을 들이지만 방송하는 즉시 생명을 다하는 우리네 다큐와 많은 노력 들여 오랫동안 살아남는 그네들의 다큐 중 과연 어느 쪽이 경제적인가라는 질문도 해보았다. 취재가 다 끝나갈 때쯤 나에게는 이승만의 무게가 느껴졌다. 해방후 냉전의 폭풍 속에서 한반도의 키를 잡은 항해사 이승만이 가진 철학의 무게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하야 후 그는 잊혀졌지만 그의 논리는 그대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통일을 위한 남북간의 대화와 협력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수년전 북한의 핵문제가 비화되었을 때 한 월간지가 “전쟁을 각오하자”고 서슬 퍼런 칼날을 치켜들었던 것도 이승만식 반공주의의 발현이었다. 나는 프로그램에서 이승만의 현재성을 강조하기로 했다.그러나 불과 20일 남짓한 후반작업으로 취재물을 충분히 검토하고, 필요한 자료들을 확보해서 최선의 완성품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웠다. 마지막 순간의 시간부족은 나에게 빠른 선택을 강요했다. 최대한 시청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가능한 프로그램의 메시지를 부드럽게 전달할 방법을 고안해내야 할 이 기간의 시간부족은 주장을 강하게 쏟아내기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방송된 뒤 “어려웠다” 혹은 “재미없었다”라는 평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대형 시리즈물의 경우 사전의 철저한 기획과 함께 개별 프로그램들의 통일성을 제고하고, 전체 시리즈의 의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후반작업 기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격동, 반세기의 통치자들」 은 mbc 다큐멘터리의 전통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게 나의 확신이다. 인물에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한국 현대사 수십 년의 기간을 우리는 훑어보았고 그 과정에서 역사다큐멘터리 제작의 노하우와 나름의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공유되고 새로운 시도들이 거듭된다면 오래 남길만한 ‘진짜’를 만들 수 있게 될 날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려운 것을 싫어하는 시청자들의 경향을 감안해 소프트한 형식을 개발해 나가되 내용만은 꼭 이야기해야 할 것들을 다루자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또한 한두 번의 실패로 “역시 mbc는 사람장사가 최고야”라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실패를 다음 기획과 제작에 밑거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필수적이라고 느낀다.|contsmar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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