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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63]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지난 2월 19일 오후 서울광장에 마련된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묵념하고 있다.©뉴시스
지난 2월 19일 오후 서울광장에 마련된 10.29 이태원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묵념하고 있다.©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2004년 12월 시카고의 브룩필드 동물원에선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30살의 암컷 고릴라인 뱁스가 신장질환으로 고통받다 죽음을 맞이했는데, 직원들은 그의 시신을 바로 거두기 전에 동물원의 전통을 따랐다. 뱁스의 동료 고릴라들을 그의 곁에 모은 것이다.

뱁스의 자식인 바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배를 어루만지다, 자신의 머리를 뱁스의 팔에 뉘였다. 미동도 없는 엄마의 몸은 한참이나 쓸었다. 바나를 따라 다른 고릴라들도 그의 곁에 머물렀다. 사육사인 멜린다 프루엣 존스는 이를 고릴라들의 경야(Gorilla’s Wake)라고 불렀다. 마치 죽은 이의 관 옆에서 장례에 참석한 이들이 망자의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던 풍습인 ‘경야’를 떠올리게 하는 장례의식처럼 보였나 보다.

애도는 누군가를 슬퍼해야 하고 슬퍼할 수 있으려면 그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한다. 고릴라가 애도를 할 수 있다면 그들도 슬픔을 느끼고 사랑을 한다는 뜻이다. 모든 고릴라가 이 의식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분명 몇몇 개체는 이 행동을 한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이 마치 하이퍼링크 사이를 넘나들 듯, 원래 읽던 책을 던져두고 뱁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던 바버라 J. 킹의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를 집어 들게 된 이유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동물들의 사별을 다룬다. 우리가 아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고, 생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기리며, 그를 잃은 아픔을 달래기 위한 다양한 의식을 치르듯이, 동물들도 아끼는 존재가 세상을 떠나면 슬픔을 드러낸다. 인간과 비슷하거나 함께 오래 살아서 우리가 그 슬픔을 손쉽게 알아챌 수 있는 유인원이나 개, 고양이 같은 반려 동물뿐만 아니라, 감정이 있는지도 몰랐던 동물들도 슬픔을 드러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고, 오로지 행동으로 드러난 모습들만 볼 수 있기에 오해하기 쉽다. 인간이 슬퍼할 때 하는 행동들과 닮지 않았다면, 그들이 표현하는 감정이 슬픔인지 알아채기 어렵다. 하지만 동료나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 동물들은 분명 특이한 형태의 행동들을 취한다. 그것이 제자리 뛰기나 목장을 뱅뱅 돌며 울부짖는 형태라서 못 알아챌 뿐이다.

이 차이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닭의 슬픔은 침팬지의 슬픔도 아니며, 코끼리의 슬픔도, 인간의 슬픔도 아니다.” 또한 같은 인간이라도 개체 간 차이가 있듯, 동물도 그러하다. 우리가 포착하지 못했다고 그들이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슬픔이 인간의 것만이 아님을, 그럼에도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슬픔을 찬찬히 시간 속에 흘려 보내는 복잡하고 정교한 의식을 발달시켰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인류학자 바버라 J. 킹의 저서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인류학자 바버라 J. 킹의 저서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동물들에게도 죽음과 애도는 삶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스트레스 사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에는 공통된 생물학적 근거가 없을까? 저자는 가설적 수준이지만 “포유 동물들이 생명 활동, 그리고 삶의 경험들로부터 생명 활동에 영향을 받는 방식이 모종의 경향성을 띤다는 관념을 진지하게 상정”(101쪽)하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몇몇 관찰 결과에 ”우리가 이러한 가능성에 매혹돼 무분별한 추측을 쏟아내지 않도록“(117쪽) 경계하길 요구한다. 

지나친 의인화에 대한 경계가 책 곳곳에 있다. 인간이 그렇게 보기로 작정하면 보이는 ‘똑똑한 한스의 오류’일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 이외의 동물이 복잡한 감정을 인간과 동일하게 느낄 것이라 전제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유독 케톤에 민감한 고양이들 가운데 오스카만이 임종을 앞둔 환자의 배 위에 앉아 죽음을 함께 기다릴 때, 한 염소가 죽은 동료가 사라지자 목장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흔적을 찾고 울부짖을 때, 우리는 모든 개체에 대한 일반화된 평가가 아니라 독특한 개체들에 대한 평가라는 유보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은 인간화된 시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코에 얹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생존과 무관하고 어쩌면 죽음을 재촉하는 행위를 십 여일 간 반복하는 돌고래를 보며 우리는 모정을 떠올린다. 한 번도 물 위로 떠올라보지 못한 자식을 코로 끊임없이 들어올리고, 지치면 다른 동료가 대신 들어올려주면서 1,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장례식장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럽다. 비록 인간의 시선에서 시작했을 지라도, 우리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없는지, 혹은 우리가 포착하지 못한 표현들이 있었던 것인지를 되물으며 이성적인 이해를 확장해나갈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이 책의 모든 것을 설명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인간이 동물의 슬픔을 낳는 근원일 수도 있으며 인간이 안긴 고통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동물들의 자살, 우울증, 자해 행위들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장은 직접 읽어보길 추천한다. 다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다. 지금 우리가 대답해야 하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물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인원들의 경야 의식을 설명하며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유인원들에게는 세상을 떠난 동료의 시신 곁에서 시간을 보내고, 사람들이 동료의 시신을 거두어 갈 때 그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257쪽) 본능을 따른다는 동물들도,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엔 이를 달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인간은 이를 위해 정교하게 장례 의식을 발달시켰고, 슬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애도의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죽은 이를 기억하는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베를린에 남겨진 2,711개의 콘크리트 비석, 오클라호마시티에 남겨진 168개의 의자, 뉴욕 한복판에 남겨진 두 개의 큰 폭포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슬픔을 긴 시간 나누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공간이다. “슬픔이 파도처럼 바다를 가로질러 시공간을 초월해 퍼지도록”(320쪽), 슬픔을 달랠 공간은 긴 시간 동안 우리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이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를, 부모를, 친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슬퍼하고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없애고, 숨기는 데 최선을 다하려 하는가? 연이어 벌어진 참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기억할 기념비 하나조차 정치와 경제의 이름으로 밀려난다. 추모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의 제목을 빌려 묻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슬퍼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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