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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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제20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허위 발언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휴정 후 재개된 1차 공판에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제20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허위 발언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휴정 후 재개된 1차 공판에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PD저널=박재철 CBS PD]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 다면 재미없지.” 인도의 경전 언어는 산스크리트어다. 노래 제목 <타타타>가 그렇다. 한자로 옮기면 ‘진여(眞如)’,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김국환이 부른 이 노래는 90년대 드라마에 삽입돼 큰 사랑을 받았다. 대중가요의 제목치고는 꽤 심오했다. 뭐랄까? ‘앎’에 있어 인간 근원의 무지를 건드렸다고 할까. 운명 앞에, 타자 앞에 우리 모두는 ‘있는 그대로’를 보기에는 그 시력이 타고난 난시(亂視)임을 일깨웠다. 조심스레 더듬거리며 그 윤곽을 겨우 가늠할 뿐이다. 

“느그 서장 어딧써? 니, 내 누군 줄 아나 임마, 에?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내가 임마! 
느그 서장이랑 어제께도 으이?
같이 밥 묵고, 사우나도 같이 가고
마, 이 개**야 다 했써.”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속 주인공 최익현은 앎에 있어 주저하지않는다. 확실히 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앎은 권력이다. 높은 사람을 알아야 자신도 높아진다. 그래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대한민국은 정글이다. 생존 처세술로 친분과 인맥만큼 유효한 수단은 없다. 많이 안 만큼, 많은 힘이 주어진다 믿는다. 

이름 붙이자면 ‘김국환의 앎’은 인식론이고 ‘최익현의 앎’은 현실론이다. 앞에 것이 철학과 신학의 맥락이라면 뒤는 정치와 사회학의 영역이다. 심층에서 둘의 성질은 판이하지만, 표층에서는 둘은 동일하게 ‘안다’로 통용된다. 예컨대 기표는 같되, 기의는 전혀 다른 경우다.
 
요즘 우리의 정계와 법조계에서도 ‘안다’ 논쟁이 한창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성남시장 재직 시절 故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처장을 ‘알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는 허위사실 공표로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는 혐의다.

여기서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서 ‘안다’의 정의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먼저 변호인 측의 주장이다.

“어떤 사람을 몇 번 이상 보면 ‘안다’고 해야 하는지,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다. ‘사람을 안다’는 기준은 상대적이다. 한 번만 봤어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번을 만났어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성남시 공무원만 약 2천500명이고, 산하기관 임직원까지 더하면 4천 명에 달한다. 김문기 씨와 같은 직급인 팀장만 600명이다.”

그러므로 김 처장에 대해 “시장 재직 때는 알지 못했다”는 진술은 허위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모습.©뉴시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모습.©뉴시스

검찰은 이렇게 맞선다.

“이 대표는 김문기 씨를 성남시장이 되기 전인 2009년부터 알고 있었다. ‘공동주택 리모델링 활성화 정책세미나’를 통해 본인뿐만이 아니라 유동규, 정진상, 김용과도 만났다.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 1처장을 맡은 김씨는 당시 이재명 시장에게 수차례 시장실에서 대면 보고를 했다. 2015년 1월에는 호주, 뉴질랜드 출장에서 함께 골프도 쳤다. 이후 ‘대장동 사업’ 핵심 업무를 담당한 공로로 성남시장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런 김문기 씨를 이 대표가 모를 수가 없다.”
 
양측의 입장을 살펴보면 ‘누군가를 안다’라고 할 때 그 층위 혹은 범주가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대표 변호인 측은 여러 부하 직원 중 한 사람인 김문기 씨를  친소 관계에서 가깝지 않아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검찰은 대장동 사업의 실무를 추진한 이와 이를 승인한 이 대표가 업무 관계상 서로를 모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 ‘타인을 안다’라는 뜻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검찰과 변호인 측에서 먼저 ‘안다’라는 논의의 범주를 통일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둘이 섞일 때 혼돈은 거듭될 수밖에 없다. ‘최익현의 앎’에서 이뤄지는 시시비비가 느닷없이 비약해 ‘김국환의 앎’으로 급변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자칫 논쟁이 격화돼 ‘우리는 어디까지 알아야 상대를 진정 안다고 말할 수 있나?’ 혹은 ‘나를 안다고 할 수 있는 자, 그 누구인가?’라는 질문들로까지 번질지 모를 일이다. 사법부가 ‘안다’의 뜻을 어떻게 정의하고 범주화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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