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우연에서 행운으로 이어진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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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회 이달의 PD상 수상작 MBC경남 '어른 김장하' 제작기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김주완 기자가 취재를 하고 MBC경남이 제작한 '어른 김장하' 1부 화면 갈무리.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김주완 기자가 취재를 하고 MBC경남이 제작한 '어른 김장하' 1부 화면 갈무리.

[PD저널=김현지 MBC경남 PD] 복권을 사지 않는다. 한 사람이 누릴 행운에는 총량이 있다고 믿는 편인데 그걸 돈에다 쓰고 싶지않아서이다. 그래서인지 돈은 몰라도 제작 운은 남들보다 좋은 편이다. 특히 <어른 김장하>는 우연에서 시작해 운으로 이어진 프로젝트다.

2019년 술자리에서 우연히 ‘김장하’라는 낯선 이름과 믿지 못할 선행들에 대해 들었고 당시에는 나쁜 운인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좋은 운으로 기획서는 회사의 제작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2년을 묵힌 뒤 어느날 갑자기 제작 기회가 왔을 때 마침 김장하 선생은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김주완 기자 역시 조기퇴직으로 여유가 생길 즈음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우연이 연이어 겹쳤다. 역시 복권을 사지 않길 잘했다.

그럼에도 그 운은 왜 하필 나에게 왔을까. 모두가 탐낼만한 아이템이지만 아무도 쓰지 않은 기획서였다.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전날 술자리에서의 놀라운 이야기를 되짚어 자료조사를 하고 기획서를 썼다. 안될 것 같아도 내가 들은 이야기를 놓칠 수 없어서 일단 썼다.

절대 인터뷰를 하지 않는 분이라지만 혹시 모를 행운을 찾아 먼지 쌓인 자료실에서 낡은 테이프들을 뒤졌다. 그렇게 1992년 형평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인 마흔여덟의 김장하를 찾았다. 우주의 기운이 문득 나에게로 쏠렸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 다만 퐁당퐁당 있는 우연과 운을 놓치지 않을만큼의 성실함이 그 순간 나에게 있었다. 되든 안되든 미리 재단하지 않고 언젠가 올 행운을 낙관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2021년 늦가을에 김주완 기자를 만나 공동취재를 제안했다. 김장하 선생에 대해 유일하게 책을 쓴 사람이기도 했지만, 상대는 물론 자신에게도 깐깐한 기자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찬양 일색의 인물다큐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김주완 기자라면 존경하는 사람도 의심해 볼 수 있고 어떤 기적에도 ‘왜?’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떤 기자인지 32년 경력을 통해 직접 증명했기에 김장하 선생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모든 자료를 공유하고 각자 다큐영화와 취재기를 만들어 동시에 오픈하자는 조금 독특한 방식의 공동취재, ‘김주완 기자가 취재하는 어른 김장하 이야기'라는 플롯까지 단박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지역 언론인으로서 김주완 기자를 존경해 왔기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부분이 영화적으로도 의미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우환 MBC경남 사장과 함께 처음 남성당에 찾아간 날, 생각보다 훨씬 자그마하고 고운 할아버지, 김장하 선생을 만났다. 분명 사람을 압박하는 말투와 눈빛은 아닌데 이상하게 자세를 고쳐앉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해 말을 꺼내자 선생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인터뷰를 거절하였다. 역시. 괜찮다. 아직 쫓겨나진 않았으니까.

기억에 남는 장학생 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평소보다 말씀도 많아지셨다. 좋은 힌트였다. 함께 진땀을 흘리며 차를 마신 사장이 돌아오는 길에 쐐기를 박았다. “진짜 멋진 분이다, 이거 꼭 해야 한다."

MBC경남 '어른 김장하' ⓒMBC경남
MBC경남 '어른 김장하' ⓒMBC경남

그 뒤는 아시다시피 김주완 기자를 앞세워 무작정 남성당에 찾아가고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정식 인터뷰는 할 수 없으니 일하시는 틈틈이 궁금한 걸 물어보는데, 옆에서는 밀린 주문을 결제하느라 카드 단말기가 계속 찍찍대고 옆방에서는 배송 보낼 약상자를 포장하느라 테이프 뜯는 소리가 요란했다. 뵙자마자 인사와 동시에 슬쩍 선생의 셔츠 앞주머니에 무선마이크를 꽂아넣는 뻔뻔함이 매번 오디오를 살렸다.

취재 과정에도 수많은 우연과 행운이 이어졌다. 한 사람을 만나면 또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며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이 쏟아졌고 카메라도 없이 그냥 들른 남성당에서 갑자기 장학생을 만나 휴대전화로 급히 촬영하기도 했다. 길거리 할머니나 그냥 잡아탄 택시기사도 김장하 선생이라면 덮어놓고 칭찬했고 조금만 뒤져봐도 여기저기 ‘나도 그 돈 받았소' 손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솔직히 너무 많은 일을 하셔서 다 전하고 싶은 욕심에 러닝타임만 한없이 길어졌다.

덕분에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무사히 제작을 마치고 연말-연초 방송과 동시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역시 행운인가?’ 싶지만 사실 이건 다 김장하 선생이 뿌린 거름에서 피어난 것이다.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요즘이라 평범한 사람의 보편상식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공동체가 이토록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된 것 같다. 진보나 보수 같은 진영논리 말고, 니편 내편 나누느라 옳고 그름은 뒷전인 속 터지는 이야기 말고 그냥, 좋은 사람이 이치에 맞는 옳은 일을 평생에 거쳐 실천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고팠으리라. 같은 목마름이 많다는 건 언젠가 단비가 내린다는 뜻이라 생각한다.

연출자로서의 행운을 좀 더 적어보자면 연출이 정말 연출만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는 것? 그런 기분이었다는 것이지 그랬다는 건 아니니 감안하시길 바란다. 이 다큐는 처음부터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기획했기에 24FPS(초당 24 프레임), 4K log촬영이었다. 보통과 다를 땐 다 돈 아니면 노동으로 메꿔야 하는데 경험도 없으니 막막했다.

이럴 때 팀장이 나서주었다. 데이터매니징부터 색보정, 음악까지 전문가들을 초빙해 사내교육을 실시했고 유통을 뚫기 위해 적극 세일즈를 펼쳤으며 지역사로서는 하기 힘든 사전홍보도 열심히 해주었다. 사실 받을 때는 잘 몰랐는데 다른 지역사에서 너무나 부러워하기에 갑자기 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전우석 제작팀장이 해준 이 지원이 앞으로는 보편 시스템이 되어서 전 팀장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도 똑같이 누릴 수 있길 바란다.

방송이 나간 후 알만한 여러 곳에서 김장하 선생을 만나뵙고 싶다는 요청이 왔다. 큰 상을 제안한 곳도 있었다. 역시나 선생께서는 모두 단박에 사양하셨다. “줬으면 그만이지. 내가 보답받을 필요도 없고.” 그러실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겪을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어떻게 한치도 흔들리지 않고 잠깐도 고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때 불타오르는 영웅은 많다. 하지만 평생토록, 조용히 남몰래 아름다운 태도를 지켜가는 영웅은 흔치 않다. 허락도 없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은퇴 후의 평온을 방해한 것이 죄송하지만 선생께서는 여전히 고요하게 자신의 테두리를 지키고 계신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김장하 선생께서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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