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여우주연상 양자경의 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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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도 악당도 없는 세상 12]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량쯔충(양자경)이 12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5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있다. 양자경은 아시아계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AP/뉴시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량쯔충(양자경)이 12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5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있다. 양자경은 아시아계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AP/뉴시스

[PD저널=박정욱 MBC PD] 배우 양자경. 내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중학생 때 비디오 테이프로 본 <예스마담>에서다. 당시 인기 절정이던 다른 홍콩 여배우들에 비해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으나 돋보이는 현란한 액션으로 이름 석자를 한국의 홍콩영화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이름을 무려 헐리우드 액션블록버스터 <007 네버다이>에서 보게 될 줄이야. 1967년도에 나온 <007 두 번 산다>에서 첫 동양인 출신(일본) 본드걸이 나온 이래 두번째 동양인 본드걸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첫 일본인 본드걸에 비해 양자경의 극중 역할은 훨씬 비중이 높다. 영화는 양자경의 특기인 중국풍 액션을 한껏 살렸다. 이 영화에서 양자경은 액션도, 외모도, 영어 실력도 탁월했다.

<007 네버다이>에서 양자경은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의 특수요원으로 등장한다. 제임스 본드는 물론 영국 비밀정보부의 특수 요원이고. 말하자면, 영국 스파이와 중국 스파이가 한 팀이 되어 위기를 해쳐나가며 로맨스도 꽃피우는 스토리이다. 중국과 서방세계가 손을 잡고 포스트 냉전의 세계를 이끌고 나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영화를 통해 엿보인다. 이 영화가 나온 1997년의 중국은 오늘날의 중국과 이미지가 사뭇 달랐다. 세계가 다시 냉전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오늘날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결정적으로 양자경을 월드클래스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는 헐리우드의 대작 <와호장룡>이다. 솔직히 중국 무협 영화를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헐리우드판 중국 무협 영화인 <와호장룡>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기는 어려웠으나 양자경과 신예 장쯔이가 펼친 액션과 연기 대결만큼은 최고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홍콩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한 양자경은 의외로 중국인이 아니다. 표준중국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이주민 3세대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변호사이자 말레이시아 중국계를 대표하는 정당인 MCA(말레이시아중국인협회) 소속 정치인이었다. 말레이시아의 중국계들은 대체로 노동자로 이주해 왔다가 일부가 사업에 손을 대 성공을 했다. 말레이시아 원주민인 말레이계와는 달리 중국계 이주민들은 강한 교육열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 전문직이나 고위 관료가 되도록 이끈 경우가 많다. 장사에도 재능을 보여 굵직한 말레이시아 기업들은 대체로 중국계가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주류인 말레이계가 장악한 정치권과 관료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중국계를 견제하고 비판했으며, 말레이 대중들 가운데에서도 성공한 중국계에 대한 시기하는 눈길이 많았다. 이들로부터 말레이시아 중국계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 MCA이다.

MCA는 중국계가 말레이시아의 주류가 되기를 추구하지 않았다. 말레이계의 중심 정당인 UMNO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중국계가 비주류의 지위를 받아들이되 재산권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수호하는 것을 핵심 정강으로 내세웠다. 양자경의 부친은 그 정당에 몸을 담고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말레이시아의 이민자 가문에서 자란 양자경에게는 중국 본토 출신들과는 다른 세계관이 형성되었으리라.

14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거리에 제95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양쯔충(양자경)을 축하하는 대형 전광판이 설치돼 있다. 말레이시아 태생의 양자경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아시아계 배우 사상 처음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AP/뉴시스
14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거리에 제95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양쯔충(양자경)을 축하하는 대형 전광판이 설치돼 있다. 말레이시아 태생의 양자경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아시아계 배우 사상 처음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AP/뉴시스

올해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양자경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다. 이 영화에서 양자경은 미국에 이민을 온 1세대로 나온다. 이민자가 낯선 땅에서 자녀를 키우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일상을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건 양자경의 가문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양자경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은, 그래서 '말레이시아 이주 중국계의 미국 헐리우드 진출 성공기'라는 긴 정체성의 여정을 거친 수식어를 달아주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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