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상회담 성과 만들기에 발벗고 나선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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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 활용' 본래 뜻과 동떨어진 '셔틀외교' 보도
공동선언 없는데도 ‘제2의 김대중-오부치 선언’ 외치는 언론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지난 21일 광주광역시 치평동 광주시의회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정상회담 결과를 규탄하고 있다.©뉴시스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지난 21일 광주광역시 치평동 광주시의회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정상회담 결과를 규탄하고 있다.©뉴시스

[PD저널=이봉우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객원연구원] 우리 언론의 보도를 통해 한일 정상회담을 보면 남의 나라 일 같은 착각이 든다. 보도량은 많지만 받아쓰기와 중계 보도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정상회담에서 다른 현안들이 거론됐다는 소식을 꼽을 수 있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복원, 독도 영유권 문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규제 철폐, 2018년 초계기 갈등 등 기시다 총리가 일본 측 요구를 윤석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이다.

다수의 일본 언론은 물론 기하라 세이지 관방장관까지 보란 듯이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3월 18일, 산케이신문은 초계기 갈등에 대해 ‘윤 대통령이 사실관계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평가까지 내려 윤 대통령이 일본 요구를 들어준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오락가락하던 대통령실이 지난 20일 내놓은 답은 “정상 간 대화는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 없다”이었고 위안부 합의는 거론되지 않았다면서도 곧바로 ‘위안부 합의 유효, 기금 정상화 검토’를 선언했다. “일본인의 마음을 얻었다”는 대통령실 자평과 함께 강제징용 피해자를 포함한 ‘한국인’들에게는 씁쓸함만 남겼다. 

더 찝찝한 건 언론 보도다. 사실이라면 기함할 일인데 너무 초연하다. 강제징용이나 정상회담 성과로 꼽힌 수출 규제와도 무관하면서 그 자체로 민감한 현안들이 줄줄이 거론됐다는데 그걸 전한 일본 언론 보도를 재인용한 보도들만 넘쳐난다.

<[한일 정상회담] 위안부 합의 향방도 주목…잔여기금 문제 등 과제>(연합뉴스 3.17)의 경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16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요청했다고 교도통신이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고 전하더니 “이와 관련, 정부는 당시 한일 합의가 유효한 합의이고 존중한다는 입장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덧붙였다. 심지어 “한일관계가 전면 회복 궤도에 들어선 만큼 위안부 합의의 실효성을 되살리려는 조치가 앞으로 검토될지도 주목된다”는 기대감까지 나아갔다.

사죄도 없는 ‘불가역적 해결’의 부당함으로 인해 한국 정부가 이미 해체한 재단의 복원을 정상회담에서 꺼내든 것도 결례인데 이를 지적해야 할 한국 언론이 도리어 ‘합의를 되살리려는 조치’에 ‘주목’하며 두어 발자국 앞서 나가고 있다.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보도한다는 건 어찌보면 ‘객관적 태도’라 할 수도 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사태를 천천히 관망하며 한국의 태도를 점검하는, 일본 정부 관점의 태연함에 가깝다. 

지난 17일 일본 현지 신문들이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한일정상회담 소식을 전하고 있다.©뉴시스
지난 17일 일본 현지 신문들이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한일정상회담 소식을 전하고 있다.©뉴시스

<조선일보>가 지난 21일 내놓은 <‘독도 논의’ 日보도도 엇갈리는데… 野, 기정사실화하며 공격>은 더 심각한 왜곡 보도다. 전날 <산케이신문>의 ‘독도는 거론하지 않았다’는 언급만으로 ‘일본 보도도 엇갈린다’고 평가절하하며 도리어 우리 야당을 향해 “일본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역공한 기사다. ‘독도는 거론하지 않았다’고 보도한 <산케이신문>의 그 기사는 위안부 합의 복원 요구, 수산물 수입규제 철폐 요구, 2018년 초계기 갈등 일본 입장이 거론됐다는 내용이다.

독도 하나 빠졌다고 ‘일본 언론도 엇갈린다’고 할만큼 한가한 사안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 야당은 기시다 총리가 대거 열거했다는 일본 측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거나 혹시 들어준 것 아니냐며 경계하고 있다. 그런 태도보다는 강제징용부터 위안부까지 일본 요구를 들어준 정부 입장이 편이 훨씬 더 ‘일본 도우미’에 가깝다. 

우리 언론의 ‘한가한 편향성’은 곳곳에서 엿보이는데 게으른 용어 사용도 눈에 띈다. 정상회담 전에 이미 ‘공동선언’이 없다고 공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제2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외쳤다. 정상회담 직전까지도 <尹 강제징용 해법은 對日정책 대전환…‘제2 김대중-오부치 선언’ 되나>(문화일보 3.16)와 같은 기사가 물밀 듯 쏟아졌다. 

<[단독] 오부치 딸 이야기도 나왔다…尹·기시다 그날 만찬 뒷얘기>(중앙일보 3.19)의 경우 ‘소맥’과 ‘러브샷’이 오갔다는 두 정상의 만찬 분위기를 전하며 “윤 대통령의 제안으로 마련된 폭탄주에 대해 ‘한·일 우호의 맛이 진짜 맛있다’고 화답하며 오부치 의원을 언급했는데, 이에 대해 외교가에선 이번 회담의 실질적 동력이 된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무게감이 정상 간의 솔직한 만찬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는 해석”으로 ‘제2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부재를 채우려했다. ‘공동선언’ 없는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을 만들어주려는 언론의 몸부림이 눈물겹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정상회담 결과와 관련한 발언을 하고 있다.ⓒ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정상회담 결과와 관련한 발언을 하고 있다.ⓒ뉴시스

이렇게 성과를 억지로 만들어 주려는 의도에서 남발되는 용어는 또 있다. ‘셔틀외교 복원’이라는 ‘성과’다.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 기준 한일 정상회담을 언급한 보도는 1200건에 달하는데 이중 ‘셔틀외교’는 300여 건, 25% 가량을 차지했다. 기시다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일본 요구를 전했다는 ‘수산물’이 47건, ‘독도’가 233건, 한일 정상이 영원히 진정한 배상의 싹을 포기하기로 한 ‘구상권’이 212건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보도량이다.

대체 ‘셔틀외교’가 뭘까? <尹, 방일 논란 ‘정면돌파’…위안부·독도·오염수는 ‘불씨’ [용산실록]>(헤럴드경제 3.20)는 위안부, 독도, 오염수 등의 문제를 ‘성공한 정상회담에서 남은 불씨’쯤으로 축소한 기사인데 ‘성공한 정상회담’의 주요 근거 중 하나로 “12년간 중단됐던 ‘셔틀외교’ 복원”를 지목했다.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의 권리를 한꺼번에 포기하려면 대단한 성과여야 할텐데 한일 정부나 언론이 쓰는 의미는 양국 정상이 빈번히 상대국을 방문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실제로 양국 정상이 자주 오가는 행위만으로 외교가 성립하고 그런 사례가 실제로 있는지 의문인데 외신이 ‘셔틀외교’를 쓴 기사들을 보면 한국 언론이 말하는 ‘셔틀외교’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일례로 지난 18일 BBC의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은 겸손의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는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 있어 과거 동맹국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아프가니스탄 철수 작전이나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기밀을 공개하고 각국 정상에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수시로 전화하는 등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 독일 등 유럽 국가의 협조를 이끌어냈다는 취지의 기사다. BBC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의 중재 노력과 성과를 “셔틀 외교가 결실을 맺었다”고 평했다.

여기서 ‘셔틀외교’는 ‘양국 정상이 오간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다. ‘셔틀외교’의 본래 의미는 대화가 어려운 당사국을 대신해 주변국, 특히 중재할 능력과 힘이 있는 미국과 같은 나라가 대신 협상을 수행한다는 의미다. ‘양국정상이 서로 방문한다’는 의미의 ‘셔틀외교’는 오로지 한일관계에서 한일 정부와 언론, 특히 한국에서만 볼 수 있다. 

‘셔틀외교’ 없는 ‘셔틀외교’와 ‘공동선언’ 없는 ‘제2의 김대중-오부치 선언’ 보도들은 모두 한일 정상회담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함이지만 정작 보도의 홍수 속에서 한일정상회담이 사라졌다. 강제징용 제3자 변제안을 먼저 제안하여 성립됐다는 한일정상회담을 전하는 정부와 언론 보도에서 좀처럼 ‘강제징용’을 찾기 어렵다.

과연 일본 전범기업은 전쟁범죄와 무관한 ‘파트너십 기금’이라도 참여를 하는 것인지,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죄는 정말 이미 50번이나 했으므로 영원히 없는 것인지, 피해자들은 이 상황을 어찌 보고 있는지, 초계기 갈등과 독도, 수산물 수입까지 정말 거론은 됐고 일본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인지, 가장 절실해야 할 한국 언론이 무관심하다. 중대한 사안일수록 우리 언론은 기본적인 직업 정신과 진정성, 신뢰를 모두 잃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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