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 되는 어떤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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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연합뉴스 영상 갈무리.
연합뉴스 영상 갈무리.

[PD저널=박재철 CBS PD]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빨간 두건을 쓴 중년 남성이 포크레인과 건물 잔해 사이를 비집고 황급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남성의 양손에는 갓 태어난 한 아이가 들려 있었다. 

그의 보폭에 따라 축 늘어뜨린 아이의 머리와 팔다리도 함께 흔들렸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마냥 위태로웠다. 타오를 생명의 심지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는 아이의 몸은 그 생명을 되살리려는 바깥의 급박함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5초가 되지 않은 짧은 영상. 하지만 그 잔상은 머릿속에 오래 머물렀다. 이 이미지 하나가 튀르키예 강진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웅변해주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탯줄도 채 떼지 않은 갓난아기가 극적으로 구조된 건 지진 발생 10시간 만이었다. 아이는 당시 숨져 있던 엄마와 탯줄로 이어진 상태였다. 어미와 자식, 그 둘이 탯줄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이런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극적인 상황에서도 ‘연결’이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구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던 때는 이 영상을 본 순간이었다. 절망과 고독, 극도의 공포 속에서도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안도감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생사의 기로에서 저울 눈금 하나를 어느 쪽으로도 옮길 정도로 결정적이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그래비티' 포스터.
2013년에 개봉한 영화 '그래비티' 포스터.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난파된 우주선에서 떨어져 나온 주인공이  망망대해와 같은 우주를 헤매다 마침내 지구로 귀환한다.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을 생존의 여정. 그때 그걸 가능케 한 건 생존자 둘을 이어준 끈 하나였다. 그 끈은 생명의 끈이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울 의지가 있는 사람, 넘치는 곳과 모자란 곳, 고립된 이와 결핍된 이가 하나의 ‘점’이 아닌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을 때 어떤 변화가 생겨날 수 있을지 프로그램을 통해 고민해보고 싶었다.

시각장애인이 보고 싶은 대상을 휴대폰 카메라로 비추면, 상대편이 화상통화 형식으로 전화를 받아 말해주는 앱이 있다. 엘리베이터 층수를 누르거나 터치식 온도 조절을 하거나 혹은 의약품 상세 정보나 우유의 유효기간을 확인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비시각장애인이 상호 연결돼 도움을 준다. 
 
그런가하면, 시로 연결된 이주 노동자들이 시집을 낸 사례도 있다. 국내 이주 노동자들의 첫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에는 네팔 노동자 35명이 쓴 69편의 시가 묶여 있다. 시집을 열면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며 길어 올린 시상(詩想)들이 펼쳐진다. 시를 알기 전과 시를 알고 난 후, 그들의 삶에 일어난 변화는 무엇일까? “말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답답함을 시를 읽고 쓰면서 풀었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을 듯싶다. 

해외 입양인 출신인 미국 기자가 만든 독립 언론 팟캐스트 “Adapted(어댑티드)”도 기획 취지에 알맞은 경우다. 2016년에 만들어진 이후로 한국계 입양인 120여 명이 출연했고 15만 명이 넘는 청취자들이 방송을 들었다. 입양인의 다양하고 독특한 이야기와 경험을 공유, 편견과 냉대에 함께 맞서며 힘과 용기를 주는 방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방송 출연진들은 이후에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유대감이 강한 정서적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어지고 맺어짐’으로써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례들은 적잖았다. 

의미는 연결에서 생긴다. 개별의 별들을 연결하면 이야기를 품은 별자리가 생기듯 무관한 것들, 단절된 것들, 대척하는 것들을 연결하면 ‘관계’가 만들어진다. 연결이 없는 삶은 의미와 관계가 빈약한 삶에 다름 아니다. 인문학은 연결하는 힘이다. ‘소외와 혐오’, ‘대결과 갈등’, ‘편협과 불통’ 등은 모두 인문학의 근력이 모자란 징후이자 연결점을 찾지 못해 생기는 사회적 통증일 것이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도 탯줄로 이어져 기적적으로 구조된 아이의 소식처럼 스스로가 하나의 희망의 증거가 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한해가 되길 바라본다. 제작 기획서를 잘 쓸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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