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대통령 빈자리 가린 언론 보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4·3 여전히 현재진행형...윤 대통령 약속 지켜질까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광장 추모제단에서 제75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제주도사진기자회) ©뉴시스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위령광장 추모제단에서 제75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제주도사진기자회) ©뉴시스

[PD저널=이봉우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객원연구원] 지난 3일, 제주4·3이 75주기를 맞이했다. 1948년 학살 주범인 ‘서북청년단’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이 추념식을 곁에 두고 ‘맞불집회’를 한다는 소식에 소름 끼치도록 정권 교체를 실감했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집권여당의 태영호 최고위원은 “제주4·3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했고 지난 3일에도 그 입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비슷한 고집은 현 정부에서 새로 임명된 김광동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에게서도 나타난다. 똑같은 주장을 담은 현수막이 4월 2일까지 걸려 있다가 추념식 하루 전에야 철거되기도 했다. ‘서북청년단’ 후예들의 집회도 유족과 시민들의 반발에 무산됐다.
 
역사가 뒤집히고 국가폭력 피해자가 벌벌 떨어야하는 이 난리법석에 대통령은 없었다. 대통령이 왔다면 과연 ‘서북청년단’이 집회를 시도했을까? 이런 질문은 사실 무의미하다. 대통령이 안 온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부터 현수막과 서북청년단은 제주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야당은 불과 이틀 전 대구에서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를 한 대통령을 향해 ‘시구는 가고 제주4·3은 안 오냐’며 분노를 표했으나 언론에 따르면 그리 분노할 일도 아닌 모양이다.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제주4·3’을 언급한 보도는 622건(이하 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 기준)인데 이 중 ‘대통령 불참’을 언급한 보도는 239건 38%, 그 중에서도 ‘불참’을 비판한 사설은 단 4건이다. ‘대통령의 불참’은 화젯거리도, 비판의 대상도 아니다. 언론은 다른 사람들의 ‘참석’에서 ‘정치적 의미’를 읽는 게 더 중요한 일 같기도 하다. 

<MB는 천안함, 文은 4·3에 5·18…전직 대통령들 공개행보 왜>(중앙일보, 4.2)는 제주에 온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서해수호의 날(24일)을 이틀 앞둔 지난달 22일 대전 국립현충원을 찾아 천안함 46용사 묘역과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 등에 참배”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행보를 열거하더니 “이 전 대통령의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의 행보를 바라보는 야권의 시선은 복잡하다” 등 온도차가 큰 ‘정치적 의미’를 달아줬다. 국가폭력 사건을 외면하고 왜곡과 혐오의 진원지가 된 정부·여당의 빈자리를 ‘전직 대통령의 공식행사 참석’이 가지는 의미로 채웠다. 

언론이 대통령의 빈자리를 다른 걸로 채운 게 또 있다. 색깔론이다. ‘제주4·3’을 언급한 사설은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단 9건에 불과한데 그 중 5건이 느닷없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대통령의 불참을 비판한 야당에게 ‘꼬투리잡지 말라’며 훈수 두는 내용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이상한데 제주4·3을 향한 왜곡과 모독까지 굳이 덧붙인 사례가 있다.

문화일보 지난 4일자 사설.
문화일보 지난 4일자 사설.

지난 4일 <문화일보> 사설 <추념식 尹 불참 트집 잡아 ‘제주 4·3’ 선동 수단 삼는 野>는 “제주 4·3사건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 훼방을 노린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폭동을 군경이 진압하는 과정에 무고한 민간인까지 대거 희생된 현대사 비극”이라면서 “민주당은 정략적 악용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했다. 

지난 3일 <한국경제> 사설 <"잊혀지고 싶다"던 문재인, 제주서 다시 편가르기 나서나>은 “국가가 억울한 희생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비극적인 현대사의 매듭을 풀어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북한과 남로당에 의한 폭동이라는 본질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썼다. ‘남로당 무장대’ 수백명의 ‘폭동’이 ‘본질’이라서 공식 집계로만 무고한 시민 1만 4738명이 희생됐다는 건 ‘사설’에서 당당히 뇌까리기엔 대단히 누추한 논리다. 반대로 최소한의 생존과 권리를 요구하는 제주도민들을 ‘청소’하기 위해 ‘남로당 폭동’을 명분으로 만든 것에 가깝다. 

제주4·3은 해방 직후 일제 부역자들을 군정경찰로 고용해 ‘반공’ 기치 아래 도민들을 탄압했으며 식량난 등을 방치한 미군정으로 인해 항쟁의 씨앗이 배태되어 있던 시대적 배경에서 출발한다. 1948년 남한 단독 선거 결정에 반발한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한 것이 발단이 되어 군정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토벌대가 파견된 것은 사실이나 토벌은 명목이었을뿐, 남녀노소 제주도민을 학살했다. 한라산에 있으면 무장대로 간주한다며 산에서 내려오라고 해놓고 죽이고, 토벌하러 산에 올라가면서 또 죽였다. 

무장대는 최대 500명으로 추정되는데 공식 사망자 중 10세 이하 어린이만 818명이다. 이 숫자에서 이미 ‘토벌’은 무의미하다. 이런 사실은 우리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로 확인된 것이며 사건 당시 미 정보국 기록에도 북한 개입은 언급되지 않았다. 4·3을 국가추념일로 격상한 것도 노동당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다. 

제주4·3엔 냉혹한 언론이 대통령의 프로야구 시구엔 너무 해맑다는 것도 대통령의 빈자리를 돋보이게 한다. <尹 대통령, 영·호남 횡단 ‘민심 잡기’ 광폭 행보>(세계일보, 4.2)와 같은 보도가 쏟아졌는데 프로야구 시구를 무려 “호남과 대구·경북(TK), 부산·경남(PK) 그리고 MZ세대 민심을 두루 다잡기 위한 행보”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시구’는 저 많은 민심 중 누구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보였을까? 언론에 따르면 ‘MZ세대’다. 

<호남·PK·TK·MZ 아우른 尹의 '1박2일'…지지율 반등 효과 낼까>(연합뉴스, 4.2)는 “(시구는)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2030 민심을 겨냥한 행보라는 분석”을 내놨다. 이만하면 충분하니 “윤 대통령의 자연스러운 시구 포즈와 표정이 MZ 세대 중심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허구연 총재가 "역대급 돌직구"라며 "야구 선수들 분발해야겠다"며 말하기도 했다”는 대통령실 입장까지는 굳이 붙이지 않는 편이 좀 덜 창피했을 것이다. <'깜짝 시구' 尹대통령이 신은 운동화는?>(매일경제, 4.2)와 같은 사례는 차마 예상하지도 못했다.  

제주대학교 총학생회와 민주노총 제주본부 등이 지난 3월 31일 오후 제주대 학생회관 앞에서 제주 4·3 왜곡 규탄 및 극우세력 망동 공동 대응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제주대학교 총학생회와 민주노총 제주본부 등이 지난 3월 31일 오후 제주대 학생회관 앞에서 제주 4·3 왜곡 규탄 및 극우세력 망동 공동 대응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시구를 포함한 대통령의 이 ‘광폭 행보’는 3월 31일부터의 일정이었는데 윤 대통령의 서문시장 일정을 언급한 보도가 4월 4일까지 260건, ‘시구’는 249건이다. 같은 기간 제주4·3 추념식 ‘대통령 불참’을 언급한 보도량은 239건, 물론 ‘대통령 불참’을 다룬 기사 중 ‘시구’를 비판한 야당 입장을 전하며 동시 언급된 보도도 많긴 하다. 그래도 이걸 굳이 대조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제주4·3 언급 보도 622건 중 학살의 주범인 ‘군정 경찰’을 언급한 보도가 7건, ‘미 군정’ 언급은 11건, ‘토벌대’는 18건에 그쳤다.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는 보도조차 찾기가 어렵다. 그래도 ‘서북청년단’은 집회를 한다고 소란을 피워서 55건이나 등장했다.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여러 모로 애달픈 75주기다. 망언의 주인공 태영호 의원도 143건이나 언급됐는데 이 간단한 팩트체크조차 드물다. 

좋은 보도들도 찾아보면 있다. 희생자와 유족의 사연들을 전해주는 보도뿐 아니라 진상규명을 기다리는 산재한 학살 정황들을 비춘 사례들도 있다. KBS제주는 <도민 3백 명 희생된 ‘죽음의 골짜기’ 대전 골령골> 리포트로 한국전쟁 전후 가장 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대전 골령골에도 제주에 형무소가 없어 대전까지 끌려간 제주도민 3백 명이 희생됐다고 전했다. 유전자 감식을 진실화해위가 맡아 올해부터 신원 확인이 시작될 것이라며 유족들의 채혈 등 협조와 시민들의 관심을 요청하기도 했다.  

제주4·3은 현재진행형이다. 다수의 희생자와 유족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공포에 떨고 있다. 제주4·3트라우마센터는 희생자와 유족들의 심리적 증상과 정신질환에 대한 치유 사업을 하고 있는데 부족한 지원 속에서도 작년에만 6400여회 방문이 이뤄졌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추념식엔 안 왔지만 대선 공약인 △고령 유족 요양시설 △유족회 복지센터 △트라우마치유센터 등의 지원이라도 지켜줘야 하는 이유다. 남은 대통령 임기 동안 4번의 4월 3일, 과연 언론은 공약 이행을 촉구할까? 이런 질문에 자꾸 기대를 잃게 되는 가운데, 언론은 75번째 제주4·3을 잃어버렸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