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치인의 탁월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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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405회국회(임시회) 제1차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에 관한 결의안 심사를 위한 전원위원회에서 토론하고 있다.©뉴시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405회국회(임시회) 제1차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에 관한 결의안 심사를 위한 전원위원회에서 토론하고 있다.©뉴시스

[PD저널=박재철 CBS PD] 최근 한 정치인의 말이 이목을 끌었다. 지난 10일, 국회 전원 위원회에서 1호 토론자로 나선 민주당 이탄희 의원의 이야기다.

7분 남짓한 연설에서 그는, 정치의 본질적인 역할과 기능이 무엇이고, 우리의 정치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그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사태의 본질을 장악한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쉽고 명료한 정치적(?) 언어로, 듣는 이의 마음에 막대를 깊숙이 넣어 휘저었다. 

그의 말은 “대한민국 정치는 암흑기입니다”로 시작했다. 이런 단언적인 선언에 대한 근거로 “국회의원 300명 중에 내 처지를 대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들었다. 지금 국민의 처지는 어떤가? 

“15.9% 고금리에도 50만원 대출을 줄 서서 받고, 전세 대출 이자 60만원 내던 사람이 200만원 내고 있습니다. 주머니에 쓸 돈이 없습니다. 출생률은 세계 꼴찌이고 기후위기로 동물은 떼로 죽고 있습니다.” 

의회정치는 대의정치다. 내 입장과 형편을 대신해 고민하고 문제 해결하는 일이 300명 국회의원의 주된 업무다. 그런데 그 300명 중 유권자의 고통과 신음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진단이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국민의 삶을 지키는 ‘본업’에 충실하지 않아도 퇴출 걱정이 없다. 이유는 뭘까? 그는 한마디로 답한다. 우리 정치의 ‘반사 이익구조’ 때문이라고.

“대통령이 양곡관리법을 거부하면서 ‘문재인 정부 때는 왜 안 했냐?’ 이러면 그만입니다. 노란 봉투법, 진짜사장 교섭법을 거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반사이익 구조니까요. 상대만 못 찍게 하면 선거에 이기니까요. 세상에 이렇게 쉬운 정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치에는 일 잘하기 경쟁이 없습니다. 대안 경쟁이 없고 문제를 방치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문제를 방치한다’는 대목일 것이다. 개선과 해결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공동체의 자원이 아무런 효능감 없이 계속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남의 말에 조롱하고 반문하고 모욕주면 끝입니다. 고소 고발하고 체포동의안 내고 악마화 하면 그만입니다. 200만 농민과 100만 하청 노동자의 생활고는 버리고 갑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래도 선거를 이기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산사태로 길 위에 큰 돌이 무너져 내려 통행자들이 앞으로 갈 수 없다. 돌을 치우라고 고용된 사람들은 니탓내탓만 하고 있다. 돌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미래가 아닌 과거에 발목 잡혀 나아질 기미가 없다. 통행자들의 현실적 고통의 무게는 길 위의 돌처럼 꿈쩍도 않는다.
 
한 정치학자는 이런 상태를 ‘법의 언어’가 ‘정치의 언어’를 잠식한 상태로 묘사한다.

“법정이 과거에 향해진 일을 다루는 데 반해, 의회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룬다.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진실 공방의 언어와 의회에서 심의 조정의 언어는 다르다.”<정치적 말의 힘, 박상훈> 

정치의 장(場)에서는 미래의 개선을 위한 말들이 창과 방패처럼 싸워야 할 텐데,상대방 책임을 논하는 과거의 귀책 사유 공방만이 난무하고 있다. 고통의 현실에는 아랑곳없다. 반사이익 구조에 기인하기에 국회의원을 대폭 물갈이해도 정치에 변화가 없다. 그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입을 빌려 이 구조를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등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가 지역 구도와 결합하는 한 우리의 정치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정책 개발보다는 다른 정당과 지도자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선거운동 방법이 됩니다. (중략) 김부겸 정도 되면 대구 출마해도 당선이 되고, 유승민 정도 되면 공천을 안 주려야 안 줄 수 없는 선거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405회국회(임시회) 제1차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에 관한 결의안 심사를 위한 전원위원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뉴시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405회국회(임시회) 제1차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에 관한 결의안 심사를 위한 전원위원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뉴시스

그의 말이 한 정치인의 수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듣는 내내 설득력을 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진단과 처방에 자기를 예외로 두지 않은 ‘윤리’ 때문이다.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처라!” 할 때, 발언자인 예수도 거기에 포함될 수 있음을 자각하는 자기반성의 감수성이 그의 말에 배어 있어서다.

“제 소속 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일 굴욕외교의 참담함을 반복해서 폭로하면 그만인 것이지 더 나아가 새 시대의 외교 전략, 그 대안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민주당이 2020년에 180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4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독주 프레임에 걸려 시간만 낭비하지 않았습니까? (중략) 이미 20년 전에 답이 다 나온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결을 못 한 이유는 딱하나, 양당의 기득권 때문입니다. 탐욕의 위성 정당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저부터 반성합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선거 시즌이 되면 투표를 독려하는 글에서 자주 인용되는 플라톤의 말이다. 여기서 ‘저질스러운 인간들’이란 어떤 의미일까? 도덕적으로 타락했거나 능력치가 한참 모자란 사람 정도의 뜻일 텐데 다소 포괄적이다. 

정치와 연관해 생각해보면, ‘말을 오염시키는 자’가 아닐까. 정치의 시작과 끝은 말이다. 말이 이치(로고스)에 닿지 않고, 말에 실천력(에토스)이 없으며 무엇보다 감동과 공감(파토스)이 없는 말은 공허해지기 십상이다. 그런 말은 실패한 말이며 실패한 정치다. 왜인가? 

정치는 분열을 통합하고, 대립을 해소하며, 갈등을 조정하는 걸 그 본질로 한다. 그런데 그 도구는 ‘말’이다. 권위와 권력에 의존하는 통치체계와 달리 민주정(民主政)에서 말의 힘은 고스란히 정치의 힘, 그러니까 정치력이 된다. 

우리의 정치가 무기력을 넘어 혐오의 단계에까지 다다른 건, 정치인의 말이 형편없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날것 그대로의 막말, 금세 탄로 날 거짓말,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의 말, 자기 발밑이 위태로운 내로남불의 말. 

2500년 전 플라톤이 지적한 ‘저질스러움’을 생생히 목도하는 지금,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긴 점점 어려운 현실이다. 이즈음 맞닥뜨린 한 정치인의 말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탁월했다. 그 성공적인 정치의 말이 무관심한 정치문화에 작은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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