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을 살피는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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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연결된 고통'의 저자 이기병 씨.
6일 방송 예정인 CBS '주말 뉴스쇼'에 출연하는 '연결된 고통'의 저자 이기병 씨가 사전 녹음하고 있는 모습. 

[PD저널=박재철 CBS PD] “사람은 신문처럼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 문화면 이렇게 섹션화 되어 있지 않아요. 일방적인 분류일 뿐이죠. 인간은 총체적인 존재예요.” 십여 년 전, 한 취재원의 말이다. 우리 사회가 분업화를 넘어 극도로 세분화하는 경향을 비판하는 맥락이었지 싶다. 

‘인간은 총체적이다’ 이 말은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측면이 있다. 사실, 조금만 살펴봐도 경제적인 것은 사람들의 심리와 깊이 연결돼 있고, 정치는 그 사회의 문화적 습속과 얽혀 있다. 

최근 출간된 <연결된 고통>(이기병 저)은 고통 역시 총체적인 상호 작용의 결과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한다. 이 흔한 이야기에 몰입감을 더해주는 것은 외국인노동자 전용 의원에서 일한 3년간의 경험, 그리고 의사로서는 다소 낯설다 할 인류학이라는 인문학적 이론이다. 이 경험과 이론을 장대로 삼아 이기병 씨는 고통에 대한 보다 높은 차원의 ‘조망권’을 제시한다. 
 
그의 책이 내게 강한 공감을 이끌어 낸 대목은 ‘아프다’라는 납작한 고통의 언어에 환자가 통과했을 법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포개서 실감이 전해질 만큼 도톰한 입체감을 부여한 점이다. 이 ‘가려진 고통’은 증상과 처방이라는 병인론적 의료행위에서는 포착이 안 된다. 

“조선족 환자 중 다수가 ‘머리가 아프다’에서 시작해 다리와 어깨가 아프고, 가슴이 뻐근하고 숨쉬기가 힘들다, 소화가 안 된다 등 다양한 증상을 쏟아냈다. 이렇게 되면 그 원인으로 뇌, 심장, 폐, 근골격계, 소화기계 등 온갖 장기들이 소환된다. 다시 말하면 특정 질병으로 좁혀 들어가 마침내 진단에 이르는 과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의학의 훈련만을 받아온 나는 이런 상황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이들은 왜 한결같이 이러는 것일까?”

그는 이런 의문의 실마리를 인류학의 설명에서 찾는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기(1966-1976) 인민공사의 노동과 대중동원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정당한 자격을 부여받는 유일한 탈출구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힌 심리적인 우울증의 증상이 아닌 신체화되어 나타나는 신경쇠약의 증상을 호소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중략) 여러 군데가 아프다고 표현하는 저변에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이들의 몸에 새겨진 고통의 문제가 재현되도록 만드는 한국의 상황, 이주노동의 각종 트라우마와 고용 불안, 같은 민족임을 기대했으나 냉담하게 돌아선 한국 사회에서 느끼는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차별과 낙인 등이 배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마음의 증상을 몸으로 표현하는 신체화 현상으로 표상된 것이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책에는 지층을 탐사하듯 그 깊이를 더해갈수록 다른 문양을 드러내는 고통의 고고학적 탐색들이 즐비하다. 그중 하나가 낙인 효과에 대한 그의 성찰이다.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에 걸린 아프리카 가나 청년이 치료를 받아야 함에도 사회적 낙인 때문에 치료 자체를 포기하려는 게 그러한 사례다. 그의 시선이 깊은 건, 1차에 이은 2차 낙인의 효과까지 가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애의 일차적 손상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쓰이는 신체 보장구 자체가 낙인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 사용을 거부하려는 욕구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잘 걷지 못하게 된 노인이 지팡이를 처음 사용할 때 느끼는 소외감, 사고 후 휠체어를 타게 된 운동선수의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 두껍고 도수 높은 안경을 써야 시력을 얻는 학생이 갖는 자기 이미지, 이런 예시는 낙인을 해결하려는 방식조차 새로운 낙인을 부여할 수 있음을, (그 점을)해결방식의 도입 전부터 사려 깊게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매일 매일 갖가지 병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통에 어느 정도는 둔감해야 직업인으로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책에서 엿본 그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무척 예민했다. 책을 쓰게 한 동력이기도 하겠지만 자칫 이 부분은 의사로서 자신만의 ‘가려진 고통’은 아닐까?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은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직업이 있다. 하나는 일과가 끝나면 일도 함께 끝나는 직업이고, 다른 하나는 일과가 끝나도 일이 끝나지 않는 직업이다. 말해 무엇할까마는 의사는 당연히 후자겠죠. 집에서 밥을 먹을 때나 아이들하고 놀아줄 때 운전을 할 때도 문득 환자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걸 막을 방법은 없어요. 직업적 숙명이죠.”

윤리학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학문이다. 고통을 더하는 것은 악이고, 고통을 덜어내는 행위는 선이다. 보상에 대한 기대나 특별한 대가가 없어도 누군가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선행은 그 자체로 의무적이며 규범적이다. 윤리의 출발점은 그러니까 인간 고통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만의 고통도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에서 우리는 왜 타인의 고통까지 살펴야 하는가? 엄혹한 현실은 이런 당위적 윤리의 요구에 거부의 뉘앙스로 답한다. 현실의 이런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고 힘도 세다. 그래서일까? 우리에게 지금은 고통에 대한 세심한 공부가 먼저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연결된 고통>은 나름 좋은 교재가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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