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중력을 훔쳐 간 빅테크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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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66] '도둑맞은 집중력'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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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스마트폰이 없는데도 느껴지는 ‘유령 진동’에 한동안 시달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중요한 연락을 놓칠까 불안했던 걸까? 주기적으로 허벅지 바깥쪽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허둥지둥 몸을 더듬다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공포가 밀려왔다. 잃어버린 걸까? 못 찾으면 어쩌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쯤, 소파 틈새에 꽂힌 스마트폰을 발견한다. 부리나케 달려가 화면을 두드리면, 심심한 알림 창이 나를 비웃는다.

중독자의 증상이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도, 영화를 볼 때에도 마음 속 눈은 스마트폰을 향해 있었다. 아내에게 혼날 정도로. 스마트폰 화면 너머에서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삶과 일의 경계가 흐릿한 내 직업은 이 중독을 정당화하기 좋은 핑계가 되었다. 한밤에도 연락이 올 사람이 있으니까, 결정을 즉각 내려야 모두가 편하니까 같은 말로 변명했다. 그 와중에도 화면에 손가락을 튕겨 새로운 타임라인을 영접했다. 언젠가 신기한 것이 등장하리라는 흡사 신실한 종교적 믿음으로. 물론 그 덕에 현실의 나는 점차 불성실해졌다. 산만해지고, 일에 실수가 늘었다. 바로 오늘까지.

요한 하리가 쓴 '도둑맞은 집중력'
요한 하리가 쓴 '도둑맞은 집중력'

이 책을 사서 첫 장을 펼치는 데 며칠이나 걸렸다. 변명을 하자면 새로 맡은 일이 처음 해보는 종류의 일이라 서툴렀고, 그래서 끊임없이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간신히 여기저기 피어나는 불길만 잡는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책 서두부터 살아보자고 며칠 전 펼쳤던 마이클 모스의 <음식 중독>을 떠오르게 하는 문장들을 마주하고 나니, 마치 안락의자에 앉은 듯 편안했다. 이 책의 저자가 <전쟁과 평화>를 읽고 눈물을 흘린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식 중독>에서 마이클 모스는 우리가 음식에 탐닉하는 게 개인이 자제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끊임없이 먹어치우도록 개발된 ‘초(超)가공식품’이 만연한 탓이라 지적했는데, 이 책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인 요한 하리도 ‘집중력’을 두고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사람의 한정된 자원인 집중력을 강탈하는 요인이 극적으로 강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습관을 개조하는 식으로 해결하려는 잘못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한 주제에 대해 더 짧게 주목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13년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50개 주제에 대해 한 주제 당 17.5시간이나 집중하던 사람들은 2016년 11.9시간만을 들였다. 더 빨리 싫증내기 시작한 걸까? 연구팀은 정보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쏟아지고 있어서라 판단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차원에서 깊이를 희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깊이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깊이는 사색을 요구해요. 모든 것을 다 따라잡아야 하고 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면 깊이를 가질 시간이 없어져요.”

미신적인 믿음과 달리, 우리의 뇌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단지 아주 빠른 속도로 일을 번갈아 하는 ‘저글링’을 할 뿐이다. 전환 과정마다 끊임없이 집중력의 누수가 발생한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동시에 여러 일을 시도하지만, 정작 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가장 집중력을 낭비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저자의 말마따나 “매일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늘씬하기를 바라는 것만큼 불가능한 꿈”의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정보의 폭포에 사람들의 선별능력은 무의미해진다. 가능한 많은 정보를 검토하려 안간힘을 쓴다 해도, 여전히 확인하지 못한 거대한 정보 더미는 당신을 숙면에 이르지 못하게 압박할 것이다. 혹시 내가 보지 못한 정보에 중요한 내용이 있으면 어쩌지? 불안함을 해소하려 경건하게 손가락을 튕겨 타임라인을 쓸어내리지만, 만족은 요원하다.

오히려 잠을 설친 덕에 대가를 치른다. 카페인 없이 버틸 수 없게 되고, 심혈관계 질환과 과로사의 위협에 노출되고, 졸다가 집중력을 잃고 실수와 사고를 반복한다. 마치 몇 년 전 출연했던 방송에서 내가 보여줬던 사례처럼. 수면 연구를 진행한 하버드 의대의 수면 전문가 찰스 체이슬러는 잠을 짧게 자는 게 문제라는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경제체제는 잠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집중력 부진은 로드킬일 뿐이에요. 그저 사업의 대가일 뿐이죠.”

요한 하리는 집중력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집중력 부족을 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거대 테크 기업들의 계산된 결과다. 사용자의 시선을 더 오래 붙잡기 위해, 그들은 거대 자본을 투여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기술을 개발한다.

이용자가 제공하는 정보로 그들의 취향을 세분화하고, 그들이 눌러봄직한 내용을 맞춤으로 제공하여 중독을 야기한다. ‘알고리즘’의 마법에 한 번씩 사로잡혀 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틱톡은 영상 선택의 기회비용을 극소화해, 이용자가 무한히 스크롤에 갇히게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논의를 프랭클린 포어의 <생각을 빼앗긴 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람도 집중력 상실에 시달린다. 누구도 정답을 모르는 ‘알고리즘’의 가호를 받고자, 콘텐츠를 올리는 사람들은 유혹의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제목을 더 ‘섹시하게’ 뽑아보거나, 대표 이미지를 바꿔보는 건 양반이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콘텐츠를 올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시시각각 확인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 올리는 이도 보는 이도 자유로울 수 없다면, 집중력의 주도권은 대체 누구의 몫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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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리는 이 집중력의 분산이 민주주의 시스템을 망가트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봉착한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면 장기간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진짜 문제를 구별해 내고, 정치 지도자에게 올바른 해결책을 요구하고, 제대로 대답하는지 책임을 물으려면, 시민들은 한 주제에 오래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수많은 매체들이 사람들의 집중력을 빼앗아 사유화하려 애쓰고 있고, 대안적 현실을 제공해 바깥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 스펙터클에 우리는 집중력의 주도권을 잃는다. 시민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민주주의는 당면한 사회·정치적 과제들의 해결에 실패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집중력을 되찾기 위해 집단적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이유다.

‘디지털 디톡스’에 모두가 동참할 수는 없다. 개인적 해결책을 강조하다보면, 그 수단을 실행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을 손쉽게 비난하게 된다. 오히려 일에 지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주4일제를 요구하고, 테크 기업이 개인 정보에 과도하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건 개인적 수준의 행동 변화로는 해결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집단적으로 집중력 되찾기에 나서야 하는 긴급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다. 바로 기후위기다. 

누군가 이 산만한 미디어 환경을 새로운 시장인 양 ‘주목경제’라 이름 붙였지만, 실상은 시선을 약탈하려는 전쟁에 가깝다. 전쟁터에선 변명이 들린다. 금방 싫증 낼 사람들이 두려워, 진지한 이야기 대신 도파민을 자극하는 짧고 강렬한 영상들을 내놓으면서도, 누구도 듣지 않는 이야기는 아무리 좋은 내용이어도 의미가 없지 않냐며. 그래서 그렇게 끌어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 무언가 전도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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