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이름'으로 안부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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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청송군 286번 버스. 사진제공=김영규 프로듀서
청송군 286번 버스. 사진제공=김영규 프로듀서

[PD저널=박재철 CBS PD] 풍경은 치유의 기능이 있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더욱 그러하다. 시간은 많고 주머니는 헐하고 딱히 할 일도, 갈 곳도 없을 때 버스를 탔다. 

생소한 번호의 버스를 타고, 낯선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까지 갔다. 돌아올 걱정이 해질녘 노을처럼 조용히 가슴속에 내려앉으면 맞은편에서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무심했다. 그 무심함이 바라보는 이를 위로했다. 버스 창을 뚫고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은 빨랫줄을 축 늘어뜨린 젖은 이불 같은 마음을 천천히 말렸다. 그때의 버스는 낭만의 이름이었다. 

버스에 대한 상념이 이어진 건, 취재차 청송에서 버스를 탄 탓이다. 출발지인 진보 시외 버스터미널에서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순환 버스, 볕이 잘 드는 곳에 앉아 ‘산소 카페(청송의 캐치프레이즈)’의 청량한 바람을 맞았다. 

청송 군내에서는 버스가 무료다. 올 1월 1일부터다. 남녀노소, 지역민 타지인, 내국인 외국인을 가리지 않는다. 버스가 청송군 공용차인 셈인데, 이를 위해 군은 연간 3억 5천만 원의 차비를 운송회사에 대납한다. 

청송군 버스 안 풍경. 사진제공=김영규 프로듀서
청송군 버스 안 풍경. 사진제공=김영규 프로듀서

청송 버스에 주목했던 건 무료라는 점보다 무료가 주는 파생 효과가 작지 않아서다. 지역의 인구 고령화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노년층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지방 중소도시들은 젊은 층 유입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지역민에게 가닿는 생활밀착형 정책들이 희소하다. 

“청송군 인구가 2만 5천입니다. 장날, 버스 타면 서로 다 압니다. ‘할마씨 건강은 어떴노?’, ‘느그 아는 속 안 썩이나?’ 버스 안에서 서로 안부도 묻고 사는 이야기도 합니다. 마실 삼아 장터로 나와 국밥도 한 그릇 사드시고, 또 돌아갈 때 고등어라도 한 마리 사 갑니다. 어르신들, 움직이셔야 건강도 더 나빠지지 않습니다.”

윤경희 청송군수의 말이다. ‘이동권 확보’나 ‘건강권 보장’ 같은 말을 쓰지 않아도 귀에 쏙쏙 박히는 정책에 대한 설명이다. 

“오일장이 서면 콩, 고추, 오만 거 다 갖다 판다. 올 때는 달걀도 사고 모종도 사고 그리 안 오나. 산골짜기에 마트가 어데 있노? 옛날에는 1300원, 왕복 2600원 아이가? 큰 돈이제. 이자는 수시로 댕겨온다. 차비 아껴가 손주 용돈 준다.”

빨간 망태기에 장본 물건을 가득 싣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햇볕에 그을린 촌로의 얼굴이 건강하다. 

누군가에게 버스는 낭만으로 기억되지만 이곳 청송에서는 교우관계와 안부확인, 그리고 나름의 경제활동과 건강증진을 매개해주는 공간의 이름이다.

“작년에 하루 평균 50여 분 탔다면, 올해 무료로 하고 나선 100여 분이 탑니다. 배로 는 셈이죠. 시골길 노면 상태가 안 좋아 혹 다치실까 조심조심 운행합니다. 늘 타던 어르신이 며칠째 안 보이면 걱정이 앞서구요.”

운전기사 전경진 씨는 청송에서 버스를 몬 지 7년이 돼간다. 같은 노선을 오래 다녀 웬만한 마을 주민들 얼굴은 다 안다. 

청송군에서 7년 가까이 버스를 운행 중인 전경진 씨. 사진제공=김영규 프로듀서
청송군에서 7년 가까이 버스를 운행 중인 전경진 씨. 사진제공=김영규 프로듀서

한번은 매일같이 읍내에 나가시는 독거 어르신이 두 달 가까이 버스를 타지 않아 며칠 마음이 무거웠다 한다. 내심 마을 이장 연락처를 수소문해야 하나 하던 차에 부고 소식을 접해 안타까움이 컸다고.

대문을 두드리며 ‘계세요?’라고 기척을 살피는 건 그곳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확인하는 평범한 일이다. 그 평범하고 단순한 일이 점점 귀해지는 세상이 되고 있다. 사람의 기척이 있어야 할 곳에 반응이 없으면 위험 신호다. 청송 버스는 마을 사람들의 인기척을 자연스레 확인하는 이송수단이 된 듯했다.

비싼 돈을 들여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행정보다는 일상적으로 인기척을 확인하고 마을 사람들의 신체적 정서적 활동을 유도하는 행정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 청송 버스에서 그 단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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