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해서 먹는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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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67] '음식 중독'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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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일어나자마자 화장대 밑으로 발을 밀어 넣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엄지발가락 끝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면 있는 힘껏 구부려 하얗고 차가운 기계에 고정시킨다. 심호흡을 하고, 당겨낸 물건 위에 올라서면 숫자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늘어나던 숫자가 멈추고 나서야 오늘도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체중’을 인류가 문제로 삼은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저울의 역사야 인류 문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사람이 저울 위에 올라 자신의 체중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은 지는 고작 400년 남짓일 뿐이다. 식탐은 오랜 시간 죄였지만, 객관적 단죄의 기준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선 후에야 세워질 수 있었다. 이때야 인간 신체의 변화를 양적으로 측정하기 시작했으므로.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의사인 산토리오 산토리오는 체중계를 만들고 그 위에 앉아 식사도 하고 용변을 보며 체중의 변화를 오랜 시간 측정했다. 그리고 이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는 체중을 건강의 중심에 두고, 이를 균형 잡힌 상태로 유지하는 게 이상적이라 보았다. ‘정상체중’이 어떤 도덕적 의미를 띄게 된 것은 이때부터인 게 아닐까?

19세기에 이르러 유럽 각국에서 동전을 집어넣으면 작동하는 공공 체중계가 기차역, 식당, 은행에 놓였다. 자기 몸무게를 재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 체중계는 사람들의 관심과 구경거리인 동시에, 스스로를 규율하는 장치로서 작동했다. 체중의 유지가 도덕적 규율로 확고해질수록, 체중계는 사적인 영역으로 숨겨졌다. 의지박약을 한탄하고, 헛되이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슬픔의 골짜기 한 가운데로.

체중이 정말로 의지 문제일까? 애초에 먹는 것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라면 어떤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음식을 먹는 데 의지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수많은 다이어트 프로그램들의 존재와, 그 프로그램을 실행해 건강한 삶을 되찾은 사람들의 증언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이클 모스가 쓴 '음식 중독'
마이클 모스가 쓴 '음식 중독'

예상하다시피, 마이클 모스의 <음식 중독>은 그게 네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며, 심지어 더 손쓰기 어렵도록 상황이 변해왔음을 지적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는 인간 욕망의 생물학적 원리를 설명한다. ‘중독’의 개념과 원리를 설명하고, 우리가 음식에 중독되기 쉽다는 사실을 알기 쉽게 말해준다. 후반부에선 그 취약한 성향을 공략한 식품업체들의 전략과 결과를 보여준다.

담배회사 필립모리스의 CEO를 역임한 마이클 시만치크가 (의도치 않게) 정의한 바와 같이 중독이란 "어떤 사람들이 그만두기 힘들어하는 반복적인 행동"이다. 자각 없이, 자제 불가능한, 반복될 행동. 음식이 그럴 수 있을까? 먹지 않는다고 마약이나 담배처럼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음식은 맛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 경험과 한데 묶여 우리를 공략한다. 좋은 음식을 섭렵한 후에도 유년기에 먹던 불량식품을 찾은 경험들이 낯설지 않듯, 우리는 음식을 기억이나 감정, 식감과 함께 먹는다. 게다가 그런 음식을 어디서나 싼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다면, 이것만큼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보상을 주는 물질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음식이 중독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에 진화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책의 절반을 할애한다.

중독의 핵심은 속도다. 쾌락을 느끼고 다시 갈망하게 만드는 이 주기를 빠르게 만들수록 사람들은 쉽게 그 물질에 중독된다. 우리의 감각을 빠르게 만족시키는 ‘초가공식품’은 우리가 쾌감을 금방 얻고, 또 금방 질리도록 만들어졌다. 빠르게 주기를 반복할수록 인간 신체의 균형은 깨지고, 중독의 즐거움과 고통은 배가된다. 저자의 말마따나 “격정의 서막”이 오르는 것이다.

몇 백 년의 시간은 인간의 유전자를 바꿀 만큼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이나 오늘날의 인간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 정도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신체가 가진 한계들을 안다. 그리고 이 한계들에 음식 상품을 판매하는 식품업체들이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 온 역사가, 가공식품의 역사다. 즉 “음식에 중독성이 있다기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먹는 것에 끌리는데 기업들이 음식을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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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초가공식품’을 피하면 될까? 안타깝게도 대형 식품업체들은 ‘건강’ 마케팅에도 도가 튼 사람들이다. 다이어트 식품 브랜드를 인수하거나, 변별점 없는 제품들을 ‘대안’으로 내세우면서 식품업체들은 활로를 모색한다. “사람들을 살찌게 하는 식품도, 날씬하게 하는 식품도 생산”하며 “비만과 정상체중을 오가는 많은 사람에게 판매할 코칭 프로그램”으로도 수익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법적 제동 장치들이나 절차들을 무마하는 시도들도 병행해 왔다.

적절한 사회적 규제 없이, 우리 본성의 생물학적 원리를 교란하는 일들을 그저 내버려둔다면 “섭식 장애가 개인의 자제력 부족 탓이라는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해 갖은 수법을 사용하며 우리 삶에 지배력을 발휘”하는 이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안다고 순식간에 달라질 건 아니지만, ‘제로 칼로리 음료’나 ‘타트체리’를 입에 넣기 전에 한 번 더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갈 길은 멀다. ‘음식 중독’은 음식 산업뿐만 아니라 미디어 산업의 기초기도 하니까.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나, 다이어트 프로그램의 유행이 온전히 식품 산업만의 작품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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